(톱스타뉴스 이창규 기자) 독립운동가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약산 김원봉은 1898년 지금의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살인 1916년 중국 톈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다 덕화학당이 폐쇄되자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했다.
김원봉은 1919년 2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 및 폭탄제조법을 수료했다.
9월에 학교를 자퇴한 뒤 동년 11월에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의열단 활동이 어려워지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뒤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요원을 모집해서 육성하던 그는 1935년 민족혁명당의 총서기가 됐다.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해서 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영향력이 축소되자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던 여운형을 도와 나라가 갈라지지 않게 힘썼다.
하지만 여운형이 암살되고, 본인도 남한 지역에서 살기가 힘들어지자 월북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김일성의 남침에 대해 반대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1958년 실각된 후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김원봉은 첫째 부인 최씨와 사별한 뒤 1931년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과 결혼했다.
박차정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939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병사했다.
세 번째 부인 최동선도 조선의용대 출신이다.
남한에 남았던 가족들 중 남동생 김봉철씨와 여동생 김학봉씨가 살아있었으며, 두 동생은 현재 모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