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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현재형이 된 죽은 자의 시간···임철우 '연대기,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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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톱스타뉴스) "괴물과 처음 맞닥뜨렸던 날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아니 여덟 살이었던가. 아마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머리 위로 땡볕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한낮. 외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뒤란의 작은 대숲을 그는 멍하니 건너다보고 있었다. 집 안은 물밑처럼 조용했다. 여느 때처럼 그는 혼자였다. 얼음 조각을 어금니에 물고 있는 것 같은 그 지독한 외로움에 그는 이미 익숙했다. 그에겐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무했다. 세 살 때 헤어졌다는 생모는 얼굴 윤곽조차 지워진 채 아슴푸레한 체취로만 남았고, 생부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비밀에 묻혀 있었다. 덥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다. 뒤란 대나무 숲은 미동도 없이 정적에 싸여 있었다. 피 묻은 쇠갈고리를 쥔 사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많은 시체들. 수면 위에 해파리처럼 풀어져 너울거리는 여자들의 치렁한 머리채···."(연대기, 괴물)

작가 임철우(64)의 다섯번째 소설집 '연대기, 괴물'이 출간됐다. 표제작 '연대기, 괴물'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저녁' '간이역' '남생이' '물 위의 생' 등 총 7편의 소설을 묶었다.

'연대기, 괴물' / 임철우
'연대기, 괴물' / 임철우

임씨는 광복과 6·25동란을 전후로 좌우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비롯된 양민 학살, 독재 군부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계엄군의 폭력 진압 등 한국 역사의 가장 처참한 사건들을 소설화해왔다.

'연대기, 괴물'은 보도연맹 사건부터 베트남 전쟁, 세월호 사건을 잇는 비극의 연대기를 그렸다. 이 연속된 고통을 괴물의 환상으로 겪어내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긴 세월 무연고자로 살아온 그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물집에 뒤덮인 채 끝내 환각을 쫓아 지하철로 돌진해 생을 마감해버린다.

제정신으로 버텨내기 어려운 시대, 너나없이 함정으로 빠져들고 광기에 몸을 맡기게 되는 순간, 가해와 피해, 죽음과 살인이 혼재된 긴 흐름을 작가는 정직하게 재현해냈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 누추한 자루 속에 담긴 한 생애의 모든 시간, 추억, 풍경 들 그리고 이야기 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고 이름 없는 세계 하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세상의 모든 저녁)

"그런데, 막상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이 넓은 세상에 내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부모, 형제, 친구조차도요. 아무도 나를 모른다면, 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이 지상에 잠시 왔다 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도록 외롭고 무서웠어요."(간이역)

소설집을 관류하는 주제는 기억과 죽음이다. 그의 소설에서 죽은 자의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현재형이 된다. 제목처럼 연속된 수난의 역사를 생의 연대기로 기입해나가며, 그 고비마다 들끓었던 폭력들을 포착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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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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