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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이직형 씨, 44년만에 무죄…피해 보상과 당시 검사 및 판사에 대한 처벌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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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김명수 기자) 유신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던 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 이직형(80) 씨가 44년 만에 누명을 벗고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판사 오영준)는 이직형(80)씨의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등 혐의 재심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20일 밝혔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에서 이씨와 참고인들이 한 진술은 불법 감금 상태에서 구타와 물고문·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에 의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며 "나머지 증거들 역시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선동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씨에게 적용된 긴급조치 제1호 및 제4호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해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면서 "애초부터 위헌이고 무효기 때문에 이씨 사건이 범죄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고등법원
서울고등법원

이씨는 한국 기독학생회총연맹 사무국 총무 대리직에 있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민청학련 사건은 "불온세력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계자 180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그는 평소 "유신헌법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며, 중앙정보부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국민의 의사를 긴급조치로 억압해 부당한 처사를 감행한다"는 내용의 불만을 표시했고 이같은 내용의 글을 연맹지에 기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 달 뒤 그는 지금까지의 학생 데모가 일반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했다며, 광화문 등에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1974년 9월 1심은 이씨에게 징역 20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지만, 같은 해 9월 2심은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2년으로 감형했다. 이후 대법원에서 이씨의 상고를 기각하며 2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씨는 지난해 9월26일께 재심을 청구하면서 "민청학련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체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구성원을 고지하지 않은 것이다"며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시정과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정부 비판 시위를 한 것일 뿐이다"고 주장했고 44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선고를 마친 후 이씨에게 "장기간 위법적 법령과 잘못된 판결로 인해서 심신에 상당한 고통을 당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늦게나마 재판부가 피고인에 대해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비록 판결은 무죄를 인정받았으나, 피해자 이 씨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당한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에 대한 판결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재판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이 씨가 기여한 바를 고려해 시민사회에서도 정부 대상 손해배상 소송 및 당시 판결을 주도한 검찰과 사법부의 담당자에 대한 성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 한 경우는 적지 않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과거 김근태 씨를 고문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가 10년간 도피할 수 있도록 방치한 검찰과 관련해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수사, 검찰의 수사 및 기소, 법원의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이미 '민청련 조직 와해'와 '관련자 엄단'을 의도했던 안기부의 계획에 따라 진행됐다"라며 검찰의 사과를 권고했다.

아울러 과거사위원회는 대통령령인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조정규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정보기관의 '안보수사조정권'을 폐지할 것도 주문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 포함 180명이 구속 및 기소됐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서도원ㆍ김용원ㆍ이수병ㆍ우홍선ㆍ송상진ㆍ여정남ㆍ하재완ㆍ도예종)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강신옥 변호사는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법정구속되기도 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당대표 역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그러나 과거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낸 공안 검사나 고문 기술자가 처벌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법관이 양심에 어긋난 판결을 내리고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 한국의 사법 질서가 사법농단과 같은 범죄를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을 보면 고문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고 국방부는 판결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서울구치소에서 8명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다. 한국 사법부 암흑의 날이었다.

명백한 사법살인이었던 만큼 검찰 및 사법부의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도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소권을 가진 검찰이 움직이지 않는 한 처벌할 방법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검찰과 사법부의 적폐와 관련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는 상태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사법부가 정의를 수호하지 않았을 때 국민이 이를 좌시할 것인가에 사법부의 정의가 달려 있다는 점은 사법부 스스로 수치스러워해야할 대목이다.

그러나 사법농단 사태를 대하는 사법부의 태도를 보면 여전히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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