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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달린 복화술"…무한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고통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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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받은 김혜순 '날개 환상통' 전복적 시선 돋보여
오랜 시간 호흡 맞춰온 한국계 최돈미 시인 번역…'문학적 우정' 또 한 번 결실

(톱스타뉴스 편집팀 기자)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김혜순 시 '날개 환상통'에서)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어워즈) 시상식에서 시 부문을 수상한 김혜순(69) 시집 '날개 환상통'의 표제작의 일부다.

연합뉴스 제공

이 시에서 화자인 '나'와 '새'는 권력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채 함께 환상통을 겪는 존재로 그려진다. 환상통(幻想痛)은 신체 일부가 절단됐거나 원래부터 없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인데도 그 부위와 관련해 체험하게 되는 감각을 말하는 의학·심리학 용어다. 환지통(幻肢痛)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이한 감각은 주로 절단된 부위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날개 환상통'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는 무거운 육신을 하늘로 띄워줄 날개가 과거엔 있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를 잃어버린 존재가 느끼는 복잡미묘한 생의 감각을 노래한다.

연합뉴스 제공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 물이 나오는 곳 /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 나를 위로해주는 곳 /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나(혹은 새)는 애도의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채 '환상통'을 겪는 존재다. 이 둘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한 몸이기도 하고, 동시에 서로 다른 개별자이기도 하다. 이들이 화장실에서 은밀히 누군가를 애도하는 행위는 사회가 강제한 규율을 벗어난 일탈이자 애도의 자격을 독점한 권력자들에 대한 전복의 행위로 해석된다.

김혜순의 열세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에는 이처럼 육신을 땅에 붙박아두려는 구속을 털고 날아오르길 염원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주로 새의 이미지에 투영한 시들이 다수 수록됐다.

이 시집의 서시 격인 '새의 시집'에서 시인은 시집 전체를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연필을 들고 / 가느다란 새의 발이 남기는 낙서"라거나,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 / 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날개 환상통'은 김 시인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고통, 생명, 죽음, 육체, 자유, 여성성, 동물성 등의 테마를 새라는 동물을 통해 매우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시집이다.

김혜순은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후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구현해오면서 한국 페미니즘 여성 시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시인이다.

'날개 환상통'은 시인이 등단 40주년이던 2019년 문학과지성 시인선으로 출간한 뒤 국내에서도 꾸준히 호평받다가 지난해 5월 미국의 출판사 뉴디렉션퍼블리싱이 '팬텀 페인 윙즈'(Phantom Pain Wings)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미국의 출판사가 "날개 달린 복화술―한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동시대 작가가 새의 언어를 전달하는 강력한 시집"이라고 자국 출판시장에 소개한 이 시집은 이후 좋은 반응이 이어지다가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말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포함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소설이나 논픽션에 비해 번역이 매우 까다로운 시집으로서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김혜순의 시들은 광대한 신화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비약, 특유의 리듬감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도 쉽게 읽히는 시는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다.

연합뉴스 제공

이런 김 시인의 시들에 영어권 독자들이 환호한 데에는 최돈미(62)라는 미국의 걸출한 시인 겸 번역가의 노력이 있었다.

그는 김혜순의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불쌍한 사랑 기계', '죽음의 자서전' 등 다수의 시집을 번역하며 김 시인과 호흡을 맞춰왔다. 이 중 '죽음의 자서전'은 2019년 캐나다의 저명한 문학상인 그리핀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돈미는 번역가이기 전에 시인이다.

전쟁과 분단의 상흔을 노래한 자신의 시집 'DMZ 콜로니'로 2020년 미국 최고 권위의 출판상인 전미도서상(내셔널북어워드)을 수상한 일급 시인이기도 한 그는 한국 시를 영어로 옮기는 데 있어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김 시인이 최돈미 시인을 만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과 독일 등지를 오가며 글을 써온 최 시인은 김 시인의 시들에 매료돼 번역하고 싶다면서 서울까지 직접 김 시인을 찾아왔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최 시인이 김 시인의 시집을 번역할 때는 주로 이메일로 김 시인과 의견을 나누며 번역의 질을 높인다고 한다.

이들은 최근에도 여러 국내외 문학행사들에 함께 참석하며 서로의 개인사까지 나눌 정도로 가까운 '문학적 동지'가 됐고, 이런 우정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이라는 또 하나의 쾌거의 발판이 됐다.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예전에는 시 번역의 어려움으로 우리 문학작품이 국제상을 수상하는 것은 먼일처럼 느껴졌지만 최돈미 시인처럼 양질의 번역을 할 수 있는 번역가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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