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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㉓ 남북 오가며 현대 민족춤 토대 마련한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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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조민재 기자)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3.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설립과 해체

2019년 은퇴한 이재일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은 1960년경에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 배치된 후 56년 동안 줄곧 언론과 출판, 문화예술 분야를 담당해온 고위 관료였다. 그가 은퇴 후 공개된 회고담에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말년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어 흥미롭다.

“(내가 당중앙위원회에 배치되어 일을 시작하던 초기에) 1960년 8월 한설야가 60돌 생일을 쇨 때 최승희, 신불출을 비롯한 여러 예술인이 찾아가 축하해준 일이 있었다. 자기에게 잘 굽어들지 않는 이들을 평소에 아니꼽게 보아오던 김창만은 그 일을 가지고 오랫동안 뒷조사 놀음을 벌이던 끝에 회의를 열고 한설야, 신불출을 비롯한 작가, 예술인들에게 이런저런 감투를 씌워 지방으로 내쫓았다. 회의 연단에 불려 나간 신불출은 한설야의 생일잔치 때 읊은 축시를 다시 외워 바치도록 굴욕을 당하였고, 최승희는 김창만으로부터 여성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인격적 모욕을 받았다. 그것은 진정한 동지적 비판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적인 매장을 목적으로 한 회의였다.”

최승희는 당시 노동당 내 2인자로 부상한 박금철(朴金喆) 당 부위원장, 김도만 당 선전선동부장과 가깝게 지냈으며 선전사업을 맡고 있던 김창만(金昌滿) 당 중앙위 상무위원이 주도한 비판 회의를 계기로 위상이 추락했다는 것이다.

1967년 박금철, 김도만이 ‘반당수정주의분자’로 숙청되면서 최승희도 비판을 받고 지방으로 쫓겨갔다고 한다. 최승희는 2년 뒤인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

이재일 증언의 신빙성은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 최승희의 친일행적, 월북 동기, 월북 후 활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았거나 논란이 되는 부분이 많다.

1927년 《별건곤(別乾坤)》 8월호에 숙명여학교를 마치고 일본 동경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한다는 한 여학생의 동정이 실렸다. 서울에서 출생한 최승희가 주인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학생이 ‘동양의 무희’로 불리며 세계의 찬사를 받고, 분단된 남과 북에서 극찬을 받는 무용가로 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뉴시스 제공
1936년 말부터 세계무대로 진출한 최승희는 유럽에서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 등 신(新)무용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 얻은 명성으로 그는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 경연대회에서 라반·비그만·리파르 등과 함께 나란히 심사위원이 됐고, 뉴욕에서 당시 NBC와 제휴하면서 미국 전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했다. 특히 뉴욕 공연 후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1940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최승희의 작품이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내용이 많다고 판단한 일제가 작품 소재의 3분의 1을 일본 소재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이에 굴복한 최승희는 일본 전통적인 소재를 작품으로 삼기도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일제 말기 일련의 일본군 위문공연이 그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을 내렸고, 이미 ‘세계적 무용가’의 반열에 오른 최승희를 군 위문공연에 줄곧 동원했다. 계속되는 일제의 압력을 벗어나고자 최승희는 베이징으로 도피해 중국 고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옛 영광을 되살리지는 못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뉴시스 제공
1946년 5월 29일 최승희는 톈진(天津)에서 미군용 수송선 LST를 타고 귀국했다. 콜레라 방역을 위해 배에 며칠 머무르다가 상륙한 최승희 일행은 6월 4일 서울로 귀환했다. 당시 최승희는 중국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 장비나 의상, 소도구 등을 최대한 챙겨왔다고 한다.

그는 인천항에 도착해 “이제야말로 조선인에게 조선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라며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롭게 무용을 할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귀국 직후 최승희는 곧바로 조선무용예술협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중국 전재동포대책위원회 사무국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6월 17일 미군정청을 방문한 최승희는 러취 미군정장관에게 “나는 앞으로 교화국 예술과와 협력하여 불란서와 러시아 발레를 모방하여 조선 발레를 창설하는 한편 조선 악기로 편성된 악단을 가진 무용연구소도 계획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군정 당국의 후원을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했다(예술통신,1946년 6월 20일 자).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난 7월 20일 최승희는 돌연 마포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갔다.

귀국 기자회견 당시 “(평양에 있는 남편을) 따라갈 거냐”는 질문에 최승희는 “나는 그런 생각이 없다”고 부인했었다. “서울은 내 고향이다. 내가 예술을 할 장소로는 서울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남편과 떨어져 서울로 온 이유를 분명히 밝혔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그의 북행((北行) 은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행을 결정하면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최승희가 조택원(趙澤元) 조선무용예술협회 위원장에게 상의하면서 항간에 ‘최승희 38선 이북행 설’이 나돌았고, 이승만(李承晩) 민주의원 의장이 만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북행(北行)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싸늘한 시선이었다. 이 문제는 귀국 기자회견부터 논란이 됐다.

귀국 회견 자리에서 최승희는 “어쨌든 친일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는 질문에 친일 사실을 인정하면서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결과가 친일한 것이다. 내가 예술로 친일을 했다면 예술로 속죄를 해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는 최승희 무용을 지양하고,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운동에 몰두하는 것”이라며 예술로 속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좌파 성향 기자들이 “일본강점기에는 일본춤을 추더니 미국이 들어오니 서양 춤을 추겠다고 한다”는 비난 기사를 쏟아냈다. 우파에게는 ‘월북자의 가족’으로, 좌파에게는 ‘친일파’로 공격을 당한 것이다.

북으로 가기 전에 <민주일보>(1946년 7월 21일 자)에 기고한 ‘해방민족의 기수로 무용창조’란 글에서 최승희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고통, 그리고 우리 민족이나 민족의 형과 선과 색과 음까지도 빼앗아가려 했을 때 나는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 음악으로 조선의 형과 선과 색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줄기 영광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이것이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내가 조선의 딸로서 걸어왔던 유일한 길이었다”라며 친일파 논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했다.

또 “오늘날 일제는 이미 파멸되었고, 우리 민족에 빛나는 발전의 대로가 열렸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된 조선 예술의 기수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예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한다”며 적극적인 활동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의 이 기고문은 서울을 떠난 다음 날에 실렸다.

남편 안막(安漠)도 최승희에게 월북을 적극 권유했다. 해방 전 옌안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던 안막은 1945년 12월초에 이미 평양으로 들어가 다음에 3월에 결성된 북조선예술총련맹(北朝鮮藝術總聯盟)의 중심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매니저 역할을 하며 최승희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친 남편이 함께 평양으로 가자고 설득하자 최승희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는 남쪽 지식인들이 다수 월북하던 시기여서 최승희도 북쪽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북을 구분하는 인식이 희미했고, 언제든 오갈 수 있는 시절이기도 했다.

또 이재일의 회고에 따르면 해방 후 서울에서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에게 김일성이 평양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을 보냈다고 한다.

최승희 부부의 북행길에는 수제자인 김백봉(金白峰) 부부와 조선문학가동맹의 간부인 이원조(李源祚) 등이 동행했다. 최승희는 마치 이웃집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검정 치마에 긴 저고리 차림이었다.

평양에서 최승희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일본 강점기에 유명 요정이던 동일관 건물을 제공했고, 9월 7일 이곳에 ‘최승희무용연구소’ 간판이 내걸렸다. 현재 냉면으로 유명한 평양의 옥류관이 있는 자리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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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소는 초창기에 연구생 정원 30명에 3년제로 운영됐고, 연구소 1층은 숙소, 2층은 사무실, 3층은 연습실로 사용됐다.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최승희무용연구소는 이후 남과 북에 현대 민족춤을 보급하는 산실(産室)이 됐다. 이 연구소에서 연구생을 가르쳤던 김백봉(金白峰)·김민자(金敏子), 연구생 출신인 김백초(金百草), 김순성(金順聲), 권여성(權麗星) 등이 월남해 각자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남한 무용계에 ‘최승희춤’이 뿌리내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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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무용연구소가 문을 연지 한달 뒤 첫 공연이 열렸다. 1부에서 조선 기본 무용을 공연했고, 2부에서는 ‘석굴암의 보살’, ‘고구려의 무희’, ‘천하대장군’, ‘초립동’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북한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열린 첫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음악가이자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으로 활동하던 정율성(鄭律成)·정설송(丁雪松)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1948년 4월 김구(김구)·김규식(金奎植) 선생 등 남쪽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을 때 최승희와 정율성이 주도해 모란봉극장에서 축하공연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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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 후 최승희는 무용극 창작에 나서 ‘춘향전’, ‘풍랑을 헤가르고’, ‘반야월성곡(半夜月城曲)’ 등 3편의 무용극을 무대에 올렸다. 무용극 창작은 과거 뛰어난 개인기에 의존한 독무(獨舞) 형식에서 집단무용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최승희는 1951년 중국으로 가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중국 전통 무용과 경극의 현대화에도 큰 공헌을 했다. 중국 무용계는 “최승희가 경극 발전에 끼친 첫 번째 공은 경극 무용 동작의 기초를 정립한 것이고, 두번째는 경극 무용의 신체 훈련법을 만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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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뒤 평양으로 복귀한 최승희는 1954년 11월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도성의 이야기’를 모란봉극장에서 초연했다. 전체 5막6장으로 구성된 ‘사도성의 이야기’는 신라를 배경으로 성주의 외딸 금희와 가난한 어부 출신 무사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소련을 비롯한 해외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1956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최승희가 주연과 안무를 맡은 이 영화는 북한 최초의 무용극 영화이자 컬러 영화였다.

한편 1953년 국립으로 승격된 최승희무용연구소는 3년 뒤 국립무용학교로 개편됐다(1972년 평양음악무용대학으로 통합). 이 시기 최승희는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자신의 춤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8년에 출간된 <조선민족무용기본>과 <무용극대본집>이 그 결과물이다.

그러나 1958년 최승희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돼 최승희무용학교의 안무가로 1년간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이재일 전 제1부부장은 “그 무렵에 최승희는 당의 신임과 배려, 사람들의 찬사에 습관된 나머지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예술이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로 교만해졌다. 그는 절간에서 사는 중들을 형상한 무용극 ‘백향전’이 천리마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당의 의견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는 데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평을 부리는 데까지 이르렀다”라고 회고했다.

그해 10월 김일성 당시 수상이 직접 작가·예술인들 앞에서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이라고 지칭하며 최승희의 ‘생활 태도’를 비판했다. 1년 뒤 최승희는 다시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에 복귀한 후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을 창작했으나 1960년 8월 ‘한설야의 환갑잔치’를 계기로 다시 비판받은 후에는 활동이 뜸해졌다.

1963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발간하고, 1966년 ‘조선무용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색’이란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문 활동을 활발히 폈다.

그러나 이전에서 비해 위상이 크게 약해졌다. 1967년 박금철·김도만 등이 숙청되면서 지방으로 쫓겨갔고, 그의 조카이자 시인이던 최로사(崔露沙)도 양강도예술단으로 밀려났다.

다만 최승희가 지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가 창작한 ‘부채춤’, 딸 안성희와 함께 창작한 ‘농악무’, ‘목동과 처녀’, ‘쟁강춤’ 등은 계속 무대에 올랐고, 그가 쓴 <조선민족무용기본>은 학교 교재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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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최로사가 평양으로 복귀한데 이어, 2003년 최승희의 묘가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면서 완전히 복권됐다. 2009년에는 ‘사도성의 이야기’가 다시 공연됐고, ‘최승희 탄생 100주년’인 2011년에는 평양과 서울에서 최승희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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