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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㉒ 정치의 계절에 호황 누린 출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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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장민준 기자)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2. ‘출판 혁명의 시대’ – 억눌렸던 대중의 지적 욕구 폭발

해방이 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서울에만 100여 개의 정당과 정치단계가 생겨났다. 그야말로 ‘정치의 계절’이었다. 그에 따라 정치와 이론을 담은 팸플릿과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 강점기 동안 억눌렸던 대중의 지적(知的) 욕구도 폭발했다.

당시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출판계는 호황을 누렸다.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방 직후 3년은 ‘출판 혁명의 시대’였다.

매년 1000여 종 안팎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출판사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1945년 45개에 불과하던 것이 1946년에는 150개, 1947년에는 581개로 늘었으며, 1949년 3월에는 공보처에 등록된 출판사가 800개가 넘었다. 그중 60% 정도만이 실제 책을 출간했다.
뉴시스 제공
해방된 뒤 1년 동안은 좌익 팸플릿과 문학책이 시장을 주도했다. 1946년 7월 초까지 간행된 202종의 책 중 좌익서적이 66종(32.7%), 시·소설 등 문학류가 31종(15.3%)을 차지했다. 당시 고서점에서 팔리는 책의 80%가 사회주의 이론서였다고 한다.

좌익팸플릿 중에서는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이름으로 1945년 9월 25일 나온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정치 노선에 대한 결정(잠정적)>가 가장 대표적이고 주목을 받았다. 이 문건은 서울에 올라온 박헌영이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제시한 정치 노선을 일부 보완해 출간한 것이다. 통상 ‘8월테제’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팸플릿들은 몇 부를 찍었고, 어느 정도 보급됐는지 알기 어렵다.
뉴시스 제공
이외에도 조선공산당의 이론진으로 활약했던 박극채(朴克彩), 백남운(白南雲), 안재홍(安在鴻) 등이 서로 다른 정치이론서를 출간했다. 1947년에 나온 김구(金九)의 <백범일지(白帆逸志)>는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뉴시스 제공
판매 부수 면에서는 역시 소설책이 베스트셀러였다. 일제 말 친일에 앞장섰던 이광수(李光洙) 등 일부 문인들은 붓을 꺾고 자중에 들어갔지만, 이들이 일제강점기 때 낸 책들은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사들도 유명작가의 신작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잘 알려진 작품들을 새로 찍어냈다. 소설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무정>, <사랑>을 비롯해 심훈(沈熏)의 <상록수>, 박계주(朴啓周)의 <순애보>, 김말봉(金末峰)의 <찔레꽃> 등이 강세를 보였다.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애정 소설류들이다. 초간은 보통 1만 부를 찍었는데, 1946년 2월 초 나온 <3·1절 기념시집>은 3개월만에 3만 부가 매진됐을 정도로 당시 출판계는 장사가 잘됐다.
뉴시스 제공
특별히 이 시기에는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국어학자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 최남선(崔南善)의 <신판 조선역사> 등이 꾸준히 팔렸고, 서울대 사학과 출신 김성칠의 <조선역사>는 1946년 초판 5만 부가 다 팔려 1948년 초에 <고쳐 쓴 조선역사>로 다시 발행될 정도였다.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만규(李萬珪)의 <조선교육사>, 홍명희의 아들이자 국어학자인 홍기문(洪起文)의 <조선문화총화>, 민속학자 손진태(孫晋泰)의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등 묵직한 학술서도 잘 팔렸다.
뉴시스 제공
서울보다 인쇄나 종이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지방에서는 자비로 등사해 책을 낸 경우도 있었고, 대학에서는 원로 교수의 강의를 정리해 교재로 돌려보기도 했다. 정치 상황은 복잡했고, 경제적으로 열악했지만, 학문적 열정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뉴시스 제공
그러나 1947년을 기점으로 책의 중심이 ‘사상’에서 ‘문학’으로, 그리고 다시 교재류의 실용서들로 중심이 옮겨갔다. 1946년 미 군정의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대대적인 좌익서적 압수가 벌어지고,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들이 폐업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문학서와 번역서 중심으로 출판시장이 바뀌었고, 번역서가 인기도서를 차지했다. 독서 경향이 ‘우리 것에서 외국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우갈등으로 많은 학자가 월북하거나 해외로 나갔고, 해외 사조의 흡수가 본격화된 것과 연결돼 있었다. 1948년에는 경제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독서 시장도 침체해 일반 단행본의 간행 부수도 1000부 정도로 떨어졌다.

한편 38선 이북의 출판 상황은 이남과 달랐다. 주요 문학가와 학자들의 주요 활동이 이뤄진 서울이 ‘지식’의 중심였고, 평양은 일찍부터 출판 통제가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해방되었을 때 이북에서 활동하던 소설가와 시인은 채 20명도 되지 않았다. 3년이 지난 후 문학가동맹의 회원 수는 200명을 넘어섰지만, 이들은 대부분 북조선노동당의 지도를 받는 문학가동맹의 노선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뉴시스 제공
1945년 이북에서 나온 책이라곤 10여 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문석준의 <조선력사>, <해방시집> 외에는 번역서와 교과서에 불과했다. 1948년까지도 이북에는 10대 정도의 윤전기밖에 없는 열악한 출판조건이었다. 그나마 그것의 대부분은 당과 정치기관에서 발행되는 팸플릿이나 번역서 출판에 할당됐다. 심지어 이북 문단에서 활동하던 이기영과 한설야조차도 작품집은 서울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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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작성된 러시아 문서에 따르면 1946년부터 3년간 당시 소련의 이론서, 문헌, 문학작품 등의 번역서가 262종으로, 인쇄 부수는 417만 부에 달했다. 그야말로 소련 서적의 번역물 홍수였다. 그만큼 출판물만 놓고 보면 소련의 사상, 이론, 정책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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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분단이 공식화되면서 출판계도 반쪽이 됐다. 남에서는 좌파 색채가 강한 책들과 월북 인사들의 책이 금서(禁書)로 지정돼 팔 수도, 출간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고, 북에서는 일찌감치 서울에서 출간된 책들의 유통이 제한됐다.

그나마 1980년대에 들어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해방공간에서 출간된 책들이 복간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근대 역사소설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홍명희의 <임꺽정>은 남과 북에서도 모두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뉴시스 제공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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