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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㉑두 건의 정치암살 1947년 정국 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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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임준호 기자)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1. 몽양 여운형과 설산 장덕수 암살사건

1947년 5월 24일 오후 5시부터 서울 필동에 있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 관저에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축하하는 칵테일 파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미국과 소련 측 미소공위 위원들을 비롯해 대표단을 비롯해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안재홍(安在鴻), 김성수(金性洙), 장덕수(張德秀), 여운형(呂運亨), 허헌(許憲) 등 당시 남한 정계의 유력 좌우 정치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당시 조선일보(1947년 05월 27일 자)는 이 행사에 대해 “여기에는 좌우의 대립도 없이 임시정부 탄생과 미소공위 성공을 축복하면서 화기에 가득 찬 국제적인 하루 저녁은 저물어 갔다”라고 표현했다.
뉴시스 제공
그러나 표면적으로나마 ‘화기애애한’ 좌우 정치인의 만남은 이 행사가 마지막이었다. 몇 달 뒤 이 행사에 참석한 여운형과 장덕수가 암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암살의 대상이 된 인물은 좌파 정치인 중 가장 대중적으로 명망이 있던 근로인민당 위원장 여운형이었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여운형은 당시 유숙하고 있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 정무묵(사업가)의 집에서 나와 리무진을 타고 계동 자택으로 향했다. 그는 4개월 전 자택이 폭파 테러를 당해 주변의 권유로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여운형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를 향하여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혜화동 파출소 옆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후진을 시작했다. 리무진은 속력을 늦추어 좁아진 공간을 비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차 뒤쪽에서 한 젊은이(한지근)가 권총을 겨누고 달려와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향년 61세였다.
뉴시스 제공
그에 대한 암살계획은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전후해 이미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미군정 측에서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여운형은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하고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암살 배후를 두고 좌파의 경쟁상대였던 박헌영이라는 설부터 경찰 수뇌부라는 설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암살행동대는 ‘백의사(白衣社)’라고 불린 ‘비밀결사’였고, 그 뒤에는 노덕술(盧德述,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등 친일경찰 출신의 경찰 수뇌부가 개입돼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지 27년 만인 1974년 한지근의 단독범행으로 매듭지어진 여운형 암살의 공범자(행동대원) 4명이 공개적으로 나타나 자신들이 여운형을 죽었다고 증언했다. 살인죄 공소시효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운형 암살 배후의 최종적인 윗선이 누구였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뉴시스 제공
여운형 암살계획이 구체화한 1947년 5월 시점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처리를 위한 법령 제정 논의가 시작된 무렵이고, 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가 확정된 때였다. 암살의 배후에 친일파 청산과 미소공위 재개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재개에 적극적이던 김규식 과도입법의원 의장이 암살의 대상으로 거론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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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여운형 암살은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겨냥한 정치 테러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해방 후 이북에서 9월 3일 발생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서기 현준혁(玄俊爀) 암살, 12월 30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宋鎭禹) 암살 등은 표면적으로 백의사와 극우 청년단체가 주도했지만, 여운형 암살사건부터는 ‘공권력’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덕수 암살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여운형 암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12월 2일 이번에는 ‘우익의 본산’인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설산(雪山) 장덕수 정치부장이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대학생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향년 54세였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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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된 후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군정으로서는 한국 내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던 한국민주당의 책임자 암살로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군정은 과거 송진우·여운형 암살사건에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문제는 용의자들이 장덕수 암살 목적으로 1947년 8월 ‘대한혁명단’을 조직했는데, 이들이 모두 대한학생총연맹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이 단체는 1947년 6월 발족할 때 김구 한국독립당 위원장을 총재로, 한국독립당 간부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을 명예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한국독립당의 중앙위원인 김석황이 암살범들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체포되기 전 김석황은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군을 배경으로 하고 임정 법통을 무시하는 도배들이 무죄한 사람을 다수 체포하여 죄를 구성하려 하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소생이 숨어다님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임정을 타도하고 선생을 모함하려는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장덕수는 2차 미소공위 참가와 단독 선거 문제로 김구와 대립했고, 단독 선거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암살의 배후로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의심했지만 나타난 결과는 편향적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암살사건 다음날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장덕수가 두 명의 경찰 복장으로 가장한 사람들에게 암살되었다. 조병옥과 장택상은 공산주의자들의 지시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승만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장덕수는 이승만을 비난했으며, 비난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미군정 정보참모부는 이승만과 장덕수가 사건 3일 전에 만났을 때 ‘어떤 문제’로 크게 논쟁을 벌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 결과는 한국독립당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총을 쏜 현직 경찰에 대한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경찰 수사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에 집중됐고, 결국에는 김구가 직접 특별재판 법정에 증인으로 두 차례나 나가야 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후에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간부들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이 났지만, 김구로서는 암살사건의 배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증인으로 공개 재판정에 섰다는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타격이었다.

김구에 대한 특별재판 출두요청서는 이례적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이름으로 발부됐다. 1948년 3월 11일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하면서 김구는 자신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모략이라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씨의 명의”로 출두장이 왔기 때문에 국제 예의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재판정에 나간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사흘 뒤인 15일 다시 증인으로 출두한 그는 “내게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함에는 나로서 이 이상 말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바로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놓고 하시오. 내가 증인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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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대목은 이 재판이 김구·김규식 등이 북측 지도자들에게 남북회담을 제안한 시점에 열렸다는 점이다. 1948년 2월 28일 하지의 정치고문이던 버취 중위는 김구·엄항섭 등을 만나 장덕수 암살사건뿐만 아니라 남북회담에 김구의 참여 여부를 논의했다.

당시 미군정 측에서 김구에게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기를 요구했지만, 김구가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월 8일 이북에 남북회담을 제의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차 증인으로 출두하던 11일 단독 선거에 불참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계속 협조 관계에 있던 김구와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결별했고, 미군정과 김구 사이도 멀어졌다.

여운형과 장덕수 암살사건은 모두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냐, 단독 선거냐 하는 중대한 길목에서 발생했다. 당시 두 사건 모두 암살의 가장 윗선 배후가 제대로 수사를 통해 규명되지 못했고, 그 여파는 1949년의 김구 암살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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