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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SBS스페셜’ 576회, ‘용현 인생사’ 영화제작 예정 ...‘과거사 정리위원회’로부터 ‘각하결정’ 통보받은 이유는? ...제주보안대원 김OO 소재 파악! ‘제주도 조작간첩사건’ 피해자의 증언 효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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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정미경 기자)  

29일 방영 된 SBS 시사교양 ‘SBS 스페셜’에서는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 - 다 하지 못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2부작 중 2부 에피소드가 공개되었다. 1부는 12월 22일(일)에 공개됐으며, 2부는 12월 29일(일)에 공개된다. 이날 방송에서는 지난 2019년 6월 9일과 16일에 걸쳐 방영된 ‘요한, 씨돌, 용현’ 이야기의 미방영분 에피소드가 공개되었다. 내레이션은 배우 류수영이 함께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김수영 시인의 ‘폭포’의 한 구절이 나오며, 1986년 이과수 폭포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남미 파라과이에서 용현은 교민들 가운데 총무로 재직하고 있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2019년 가장 특별한 감동 요한, 씨돌, 용현을 기억하시나요? 어디에나 있었던 사람이 있다. 1987년, 故 박종철, 故 이한열, 故 정연관 등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청년들의 가족들에게 방패이자 지팡이가 되어주었던 사람, 요한. 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현장에서 생존자를 구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괴짜 같은 행동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강원도 정선군 봉화치 마을의 자연인, 씨돌”이라고 ‘요한’이며 ‘씨돌‘이고, 또 ’용현‘이었던 사람에 대해 소개했다.

SBS시사교양 ‘SBS 스페셜’ 방송 캡쳐
SBS시사교양 ‘SBS 스페셜’ 방송 캡쳐

2019년 8월, 용현 씨를 다시 만난 곳은 바로 병원이었다. 그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가 된 상태였다. 그의 본명은 ‘김용현’이지만, 세례명은 ‘요한’이며, 자연인으로는 ‘씨돌’이라 불렸다. 이날 방송에서는 제작진이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을 찾아간 이야기가 공개되었다. 이들은 그 곳에서 ‘파라과이 진리와 정의위원회 대표’인 고이브루 로헬리오를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작진이 들은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80년대와 상당히 유사점이 많았다.

그렇게 제작진이 이 이야기를 향해 찾아가게 된 시작은 바로 용현에게 있었다. 이과수 폭포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본 용현 씨가 한 이야기에 바로 그 단서가 있었다. 당시 파라과이에서는 성직자들의 독재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들은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군부 독재를 반대했다. 하지만 독재자의 총구는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이날 방송에서는 청년 용현이 남미 파라과이로 간 진짜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그가 파라과이로 떠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한 시발점은 바로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었다. 현재 제주도 명월리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 역시 용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용현은 제주도에 땅을 사 ‘사랑과 믿음’이라는 장애인 재활시설을 지어 장애인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당시 낯선 육지청년의 등장에 마을 주민들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날 방송에서는 1982년 11월 24일, 동아일보에 용현이 기고한 글 한 편이 공개되었다. 당시 용현은 ‘사랑과 믿음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이곳은 심신장애 형제들과 힘을 합해 새로운 세계를 가꾸는 보금자리기도 하다. 자활의 보람을 나누며 씨를 뿌리며 꿀벌도 길렀다. 나는 믿는다. 신성함이 넘치는 한 줄기 햇살이 이 초원에 가득 내려질 것을”이라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1982년 제주에는 남한 내에 5만 명의 북한 간첩이 있다는 언론들의 지나친 보도로 인해, 그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당시 제주도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 강광보(79세) 역시 그 때의 참혹한 현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광보 씨는 “여기는 언어 장애인도 말할 수 있게끔 하는 곳이고, (...)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더라고, 여기는 인간도살장이라고”라고 말하며 당시 모진 고문을 당했던 때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강광보 씨는 일본에서 지내는 시간을 북한의 조종을 받아 간첩으로 활동했던 것이라 오해 받아, 결국 수감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토로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용현 역시 간첩으로 몰렸다. 그렇게 결국 삶이 벼랑으로 몰린 용현은 파라과이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게 파라과이로 갔던 그는 ‘본회 총무직으로 수고하던 김요한 씨가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라는 문구를 남기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변 지인에게는 “한국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남긴 후였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에는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용현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 ‘TIME’ 잡지 1987년 6월 29일 편에 용현의 시위 장면이 사진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이어서 동일한 때 명동성당에서 열린 시위에도 그는 참여했다. 영상으로 생생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용현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날 방송에서는 청년 용현이 고시 공부를 했었던 사연이 공개되었다. 당시 그는 법조인이 되어 힘이 약한 자들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1981년 사법고시 23회 때, 그는 시위전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탈락의 쓴 맛을 보게 된다. 계속해서 1981년의 독재전권 개입의지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시 사법시험 면접 탈락자는 무려 27명이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전례였다고 한다. 당시를 회상하며 한 법조인은 “저희들이 23회 시험 볼 때부터 면접시험 체크리스트에 국가관이라는 것을 넣습니다. 시위전력이 국가관에 저해가 된다, 마이너스라고 판단한 것이죠”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 역시 3차 면접에서 연속으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그러한 연유로 용현이 사법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공개했다.

용현이 시위전력이 있던 때를 알기 위해서는 1970년-1971년 진행된 ‘교련교육 반대시위’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교련교육을 시작했다. 용현의 대구지역 선배인 백현국(72세)은 “교련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안보 문제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결국 18살 학생 시절의 시위 전력이 28살 사법고시를 앞둔 청년 용현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용현의 민주화 운동 당시 영상은 1989년 2월 명동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군부독재로 인해 수없이 탄압을 받았던 용현은 결국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위한 서류를 제출한다. 그는 ‘김용현 미행감시 및 가혹행위 의혹사건’, ‘제주보안부대원 폭행피해사건’ 등의 서류를 제출하며,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각하’ 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에게 보내진 공문에는 “2007. 3. 6. 개최된 제 27차 인권침해규명위원회에서 김용현 님께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신청하신 ‘제주보안부대원 폭행피해사건’(사건번호: 라-671)에 대하여 각하결정이 의결되었음을 붙임과 같이 통보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통보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참여정부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며, 5년간의 활동기간 동안 11,175건을 접수받아 8,450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했다고 한다. 이날 방송에서 제작진은 당시 위원회로 참여하였던 한 사람을 찾아가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각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 과정에서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조사를 개시할 필요가 없다”라고 ‘각하’에 대한 의미를 표했다. 하지만 당시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에서 파견 된 단 한 명의 조사관이 용현에게 배정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진상규명 결과에 여러 의미를 시사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날 방송 말미에 제작진은 결국 용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제주보안부대원 김씨’를 찾아갔다. 그는 “자연인 프로그램에서 봤습니다, 이 사람은”이라고 말하며 용현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연이은 제작진의 질문에 자신은 당시 자체 징계를 먹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여 용을 썼다. 심지어 자신이 더 피해본 것이 크다고 말하며, “이 사람들 웃긴 사람들이네”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여기에 욕설과 고함을 내뱉기도 했다. 결국 제작진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식 방송에서 나온 용현 ‘다 하지 못한 말’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김용현 님 관련 사건을 모두 각하 결정되었고. 제주보안대원 김OO은 한 번도 조사 받지 않았다. 현재 김용현 님은 후원금을 통해 양한방 재활치료를 받으며 요양 중이다. 대한민국 현대사 어디에나 있었으며, 자신을 위한 높은 타을 쌓기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디딤돌이 되어준 김용현 님의 인생사는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라고 마지막 소개가 되었다. 다음 방송은 ‘끼니외란’으로 ‘다이어트’와 ‘건강’에 대한 2부작 방송이 진행된다. 1부는 ‘다이어트 막전막후’라는 내용으로 1월 5일(일)에 방영되며, 2부는 ‘영양제 진실게임’으로 1월 12일(일)에 공개된다.

SBS 시사교양 ‘SBS 스페셜’은 “'PD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두(話頭)'. SBS가 정규 편성된 본격 다큐멘터리를 선보입니다. 새로운 다큐멘터리, 미래가 보이는 다큐멘터리,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표현으로 다가서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매주 새로운 화제로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매주 일요일 오후 11시 5분에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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