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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선을 넘는 녀석들’ 설민석X최희서X전현무X유병재X김종민,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헌화

  • 진병훈 기자
  • 승인 2019.11.1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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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기자] 11월 10일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드디어 국경선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시작이자 끝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지난 9월, 백 년 계약을 맺었던 최희서 씨가 특별히 출연했다.

이곳 연해주는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넘었던 선이었다.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야만 했던 유럽 극동의 이방인들이었다. 그 삶의 흔적을 찾아 신한촌(한인들의 새로운 마을)으로 향했다. 구한촌은 신한촌 이전의 초기 마을이었다.

구한촌의 또 다른 이름은 개척리로 이주 과정을 거치며 500호 이상 한인 가구가 늘어난다. 러시아인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개척을 해내기 시작한다.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꿋꿋이 버텨 온 것이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의 비보가 날아온다.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의 소식에 독립을 위해 개척리 동포들이 일어선다. 그중 344호 건물이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최초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된다.

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위해 작전을 짰던 대동공보사도 개척리에서 발간됐다. 개척리가 없었다면 하얼빈 거사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개척리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국땅까지 들려온 망국의 소식,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에 좌절을 겪는다.

또 하나의 비극은 콜레라 창궐을 이유로 신한촌으로 이동한다. 나라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은 재러 동포들은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제작진이 온 곳은 바로 신한촌·신개척리였다. 사실상 신한촌은 국권 피탈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신한촌은 어떤 모습일까? 보통의 러시아 동네와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는데 한인의 흔적이 남겨진 연해주 신한촌 기념비가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한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1919년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고 나와 있다.

우리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04), 서울의 한성정부(1919.04),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1919.03)의 3대 정부가 있었다. 설민석과 더불어 김종민, 유병재, 전현무, 최희서는 추운 이국땅에서 대한 독립을 외쳤던 그분들을 위해 헌화와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최희서는 “기념비 같은데 어떤 무늬도 없어서 추측을 할 수 있다. 기둥 세 개의 의미는 하나는 남한, 하나는 북한, 또 하나는 해외 동포들이다. 우리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뜻이다. 옆에 보면 작은 돌도 보이는데 총 8개로 조선 팔도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처음에 척박한 영토를 개척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주민 우대정책을 펼쳤다. 오히려 러시아보다는 한인들이 더 많았다. 문제는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자 러시아가 일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독립운동 세력이 일본의 눈에 거슬리자 한인들이 러시아에게 배척당한 것이다. 러시아의 박해까지 있자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민석은 “왜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하는지 여기서 느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방송 캡처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방송 캡처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방송 캡처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방송 캡처

MBC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는 매주 일요일 밤 9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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