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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79 부마’ 유재명, 부마민주항쟁 흔적 더듬어 “촛불혁명까지 이른 민주주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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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구 기자] 부마민주항쟁 4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79 부마’가 화제다.

16일 KBS1 ‘1979 부마’에서는 부산과 창원 일대 시민들이 유신체제에 맞섰던 ‘부마민주항쟁’을 세세히 조명했다.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에 저항해 1979년 10월 16일부터 닷새간 부산과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회원구)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시위 기간은 짧았으나, 군사정권 철권통치 18년을 끝내는 계기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4대 민주화운동 중 하나로 꼽히며, 지난달 늦게나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부산광역시 남구 출신으로 약 20년을 부산 일대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한 유재명이 ‘1979 부마’의 길잡이로 나섰다. 그는 1973년생인 자신이 아주 어린 시절에 ‘부산민주항쟁’이 벌어졌던 부산대학교, 부산민주공원, 부산민주항쟁기념관 등의 곳곳을 두루 돌며 처절한 항쟁의 흔적을 차츰 더듬었다.

1979년 부산대학교의 중심에서 누군가 외쳤고, 학생들의 심장에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일어났다.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 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서며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부마민주항쟁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다”며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저 사태가 서울 등 전국 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발언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우용 역사학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부마항쟁의 (분위기가) 잠시 잠복해 있는데 또다시 일어나서 전국으로 확산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이적행위로 규정을 하고 그에 따라서 군인이 발포해도 관계없다(고 반응하자 그 말을 들은) 김재규가 ‘이 버러지 같은’이라고 하면서 차지철과 박정희를 쏴 죽임으로써 유신체제를 종말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홍구 역사학자는 “우리는 박정희의 경제 성장 신화만 들었지만 사실 박정희가 총에 맞게 된건 박정희식 경제 모델이 파탄 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화학공업의 성장이 과잉 투자되면서 벽에 부딪혔고, 또 도시에서는 부가가치세를 시행하다 보니까 서민들 입장에서는 물가가 10% 올라갔고, 상인들 입장에서는 판매액의 10%를 세금으로 떼어가는 그런 상황이 되니까 시민이나 소상인의 불만이 가중됐다”고 말했다.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이어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박정희 정권이라는 게 참 끼리끼리 해먹는구나 하는 게, 우리나라의 3대 공업단지라고 하는 구미는 바로 박정희의 고향이고, 그 다음에 울산이 이후락의 고향인 거고, 마산·창원 그 일대가 박종규의 고향 아닌가. 거기에 있었던 전통적인 대학이었던 해인대학을 인수해서 경남대학이 됐단 말이다. 경남대학이 바로 박종규의 개인 재산이라고 할까”라고 덧붙였다.

부마민주항쟁 고문 피해자 송두한 씨는 “시멘트 바닥에나 무릎을 꿇게 하고 곤봉을 집어넣었다. 곤봉을 넣어서 뺑뺑 돌리는 거다. (경찰이) ‘구속영장 신청됐다’ 이러더라. 그래서 저는 이제 취업된 회사도 못 가고 이제 내 인생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한영식 씨는 “‘임마 주동자다’ 이렇게 하니까 막 거기서 그 자리에서 진짜 엄청 맞았다. 이유도 없이 때리는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관에 보관된 부마민주항쟁 참여자 故 추송례 선생의 일기에 보면 “부산진역 앞에서 어제에 이어 오늘 또 일이 났단다. 온 시민이 합세하여 경찰서, 파출소 할 것 없이 쑥밭을 만들었다. 아, 정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혁명이다”라고 기록돼 있어 큰 울림을 전했다.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전우용 역사학자는 또 “쉽게 말해서 부마항쟁은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에서 87년 시민혁명, 나아가서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민 주도 민주주의 성장에서 최초의 씨앗. 4.19는 그야말로 학생시위였다. 최초의 싹을 뿌린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한홍구 역사학자는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그 유명한 서구의 말이 우리에게도 현실로 다가오게 된 거고, 민주주의가 우리와 피와 살이 되기 시작한 거다. 그 전에는 모자였고 외투였고,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피부가 되고 근육이 되고 뼈가 되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 시민적인 참여를 끄집어냈고, 그게 6월 항쟁으로 촛불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
KBS1 ‘1979 부마’ 방송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