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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은 녀석들’ 이완용, 이시영 일가와 대조되는 ‘최악의 매국노’…최희서 눈물

  • 한수지 기자
  • 승인 2019.09.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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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지 기자] ‘선을 넘은 녀석들’에서 이완용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선녀들)에서는 설민석, 전현무, 최희서, 김종민이  남산을 찾아가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 알아사는 시간을 가졌다. 설민석은 같은 명문가였던 친일파 이완용과 이시영 일가의 삶을 비교하며 알기 쉽게 설명을 해나갔다.

분노를 자아내는 이완용의 만행과는 달리 이시영 일가의 삶과 업적은 큰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형제를 모두 잃고 조국을 되찾은 이시영 선생의 사진을 본 최희서는 눈물을 쏟기도 했다.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시영 선생이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기 때문.

한편, 이완용은 한말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이완용느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우봉 이씨이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병을 얻었고 이듬해 5월 귀국해 요양 생활을 했다. 이후 이조참의 겸 전보국회판, 외무참의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고종의 명으로 미국공사관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1890년 귀국하여 대사성·교환서총판을 역임했다. 그는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었지만 조선왕실에 대해 개화를 주창하지 않았으며 유교와 전통사상을 고수했다.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을 중심으로 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정동파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했다.

제2차 김홍집내각이 와해되고 박정양이 과도정부의 내각총리가 되자 이완용은 내무대신으로 발탁됐다. 박영효 등 개화파의 급진적인 정책에 반대했으며 온건책을 견지했다. 1895년 제3차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학부대신·중추원의관이 되었으며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를 열어 근대적인 교육정책을 펼쳤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에 대원군이 주도하는 제4차 친일파 김홍집내각이 들어서고 이완용은 해임되었다. 이완용은 미국공사관에 머물면서 감금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켜 친러내각의 복원을 시도하였고 결국 춘생문사건이 일어나게 됐다.

하지만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이자 1896년(건양 1년)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계획했다. 이완용은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각종 이권을 요구했고 독립협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완용은 이를 중재하려 했지만 양쪽 모두에게 배척됐다. 1897년 내각에서 밀려나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됐다가 1898년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그해 양부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완용 / 네이버
이완용 / 네이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됐다. 고종황제는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이완용은 이때부터 변절하여 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해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賊臣)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이때 그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됐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켰다. 당시 수만명의 군중들이 덕수궁으로 몰려가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규탄했고 그의 집은 군중들에 의해 불탔다. 그해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으며 이로써 인사, 입법, 행정 등 주요 권한을 일본에 이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 단독으로 기유각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고 그해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이 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됐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했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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