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뉴스 김명수 기자) 지난 18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시즌 3은 시간의 선을 넘는다.
서울 광화문 앞에서 만난 설민석, 전현무, 유병재는 서울 다시보기를 하기로 했다. 이날 방송엔 영화 '박열'의 배우 최희서도 함께 했다.
경복궁 앞에 위치한 해태는 다른 말로 해치라고 하며, 정의의 신이다. 조선시대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관복에는 그래서 해치가 그려져 있다.
또한 불을 막는 수호신으로 정도전이 경복궁을 설계하며 풍수지리상 화기를 누르고자 해태를 경복궁 앞에 설치했다는 설도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은 여러차례 수난을 겪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를 가린다는 이유로 해체될뻔 했고, 동문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박정희가 재건했으나 나무가 들어가지 않는 철근 콘크리트였다. 이것을 다시 헐고 2010년 제대로 된 목조 광화문이 재건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경복궁 내에 500동 정도 있던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40동 정도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경복궁 내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광복 후 국회 건물로 사용되다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했으며 광복 50년만에 김영상 점부가 철거했다. 경복궁은 2045년까지 200동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를 하는 등 나랏일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청궁에 위치한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곳이다. 바로 을미사변이 발생한 장소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을 차지하게 되고, 이를 견제하려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였고 결국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됐다.
이에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결국 일본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곤녕합 안내판에는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장교들이 새벽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적혀 있다.
이날 방송에는 독도연구소장인 세종대학교 호사카 유지 교수가 출연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에서 우연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접하게 됐고, 일본에서 이런 내용을 전혀 교육하지 않아 무척 충격을 받았고, 언젠가는 한국어로 한국인들과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게 계기가 되어 귀화까지 했다고 밝혔다.
이름을 개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독도연구소 주변인들이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독도 관련 연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역사 교육은 이토 히로부미까지만 교육하고 이후의 역사를 자세히 교육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 원폭 피해 사실 등은 상세하게 가르치고 있다.
한반도를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에 대해서는 상세히 교육하지 일본인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 호사카 유지 교수의 설명이다.
800명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군함도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면서도 전혀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드라마를 통해 근현대사를 배울 수 있으나 일본에는 근현대사를 다루는 드라마가 없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관련해서는 일본에서는 일체의 교육이 없기에 일반적인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호사카 유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일본인만이 아니라 친일파들이 앞장섰다. 약 50명이 명성황후 사건에 가담했으며 대부분이 일본의 엘리트였다.
일본인이 설립한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 미우라 고로 조선 공사 등 심지어 하버드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주범들이다.
이 사건은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사건이다. 행동대의 중심인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육군 소령 출신으로 낭인들을 규합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이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 다들 권력을 누렸다고 한다.
설민석 선생에 따르면 살인범들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전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도는 후쿠오카의 구시다신사에 봉납되어 있으며, 심지어 이칼로 명성황후를 베었다는 기록마저 같이 남겨져 있다. 이 칼의 칼집에는 '번개처럼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암호가 '여우사냥'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보란듯이 그 칼을 기념하고 보관하고 있어 일본의 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해범 3명 중 2명의 후손이 2005년 명성황후의 묘를 찾아 사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