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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박정희와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한다는 위험한 반역가 요시다 쇼인은 누구인가?

  • 김명수 기자
  • 승인 2019.08.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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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기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조선을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자 아베 신조 총리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져 있고, 독재자 박정희가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던 인물이다.

A급 전범의 명부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도 원래는 요시다 쇼인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알려졌다.

일본 우익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요시다 쇼인을 살펴 오늘날 일본 극우가 왜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지 살펴본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에 태어나 1859년에 사망했다. 본명은 토라지로이며 쇼인은 아호다. 아베와 일본 우익의 결사체 '일본회의'는 메이지 유신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데, 메이지유신의 출발점이 다름아닌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은 다름아닌 일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구축한다는 사상이다. 지금의 일본 우익의 대표적 단체인 '일본회의'의 생각도 역시 존왕양이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그린 초상화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그린 초상화

존왕양이는 본래 중국의 사상으로 중국의 한족이 한족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오랑캐라 일컬으며, 왕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라는 사상이었다.

1867년 메이지유신 역시 메이지왕 시절에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고하면서 이룩한 변혁을 의미한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근대적인 통일국가가 되면서 서구열강의 근대국가를 모델로 부국강병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뿌리를 되짚어보면 메이지유신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요시다 쇼인이 활동했던 곳은 조슈번이었다. 지금의 후쿠오카 야마구치현의 하기시다. 후쿠오카와 히로시마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하기시는 바닷가의 작은 도시다.

숙부 요시다 다이스케의 양자가 된 그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양부가 사망하면서 가직인 병학사범을 승계하게 되고, 병학사범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19세에 독립한다. 조슈번의 하급무사가 된 것이다.

막부체제의 병학사범인 요시다 쇼인은 당연히 전쟁과 관련된 전문가일 수 밖에 없다. 병법 외에도 무사로서의 기본 소양인 검도와 창술 등도 익히 요시다 쇼인은 결국 군사교관 정도로 보면 된다.

조슈번 내의 하급무사였던 요시다 쇼인은 운명의 굴곡을 거쳐 평민으로 전락했다가 번주인 타카치카의 도움으로 10년이나 일본 전국을 유람하면서 견문을 넓힐 행운을 잡았다.

막부 시대에 자유로운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그의 번주가 이를 허용하면서 다양한 문물을 접하게 됐던 것. 특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동양함대를 보고 충격을 받은 쇼인은 서양 학문에 대해서도 연구하면서 서구로 밀항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감옥에 수감된다.

요시다 쇼인에게 영향을 준 사상 중 하나는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 '신론'이다. 일본이 신국이며 신성한 나라라는 신론의 영향을 받았기에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로 빠져들게 된다.

시골의 하급무사도 못되는 요시다 쇼인이 존왕양이를 주창한 것은 하기번주가 쿠데타를 통해 막부를 뒤엎고 일왕을 앞세우는 정치적 쿠데타를 원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계책을 실행하지만 그로 인해 문하생들조차 그의 곁은 떠난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 막부에 의해 사형당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서구 열강에 대항해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진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출세를 위해 번주의 눈에 들려 노력한 기회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요시다 쇼인은 하기시의 쇼카손주쿠라는 작은 사설학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이토 히로부미도 여기서 교육을 받았다.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에게서 배운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침략에 앞장 선 것은 당연한 결과다.

요시다 쇼인의 영향력은 당시 매우 작았다. 작은 글방 선생이 현실에서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전무했으나, 그가 가르친 문하생 중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메이지유신의 실세로 떠오른 덕분에 요시다 쇼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일본의 우익은 지금도 당시의 대동아정벌에 대해 정당한 방위전쟁이라고 말한다. 서구 열강이 끝없이 밀려오고 중국마저 아편전쟁으로 무너지는 것을 본 일본은 서구 열강을 막아내기 위해서 역으로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요시다 쇼인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공부하는 군인 정도로 볼 수 있다. 본업이 학자가 아니라 군인에 가까운 요시다 쇼인은 막부의 요인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등 위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야마구치현의 조슈번이라는 작은 번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신세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천황을 옹립해 조슈번주가 쿠데타를 일으켜 막부를 타도하길 원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후원했던 번주도 이용하고, 천황도 이용 대상이었던 셈이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막부의 마나베 아키카츠를 암살하려 시도했고, 암살 시도가 실패하면서 감옥에 갇혔고 결국 사형을 당했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출신 중 히토 히로부미가 1868년 조슈신사를 세우고 요시다 쇼인과 동문들을 기렸다. 조슈신사는 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이름을 바꿨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의 배경을 보면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주장인 신론에 기반한 선민의식에서 출발한다. 일본이 신의 나라이며 천황은 신성하기에 다른 나라를 침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특히 조선을 침략하고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기에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메이지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발전시키게 되면서 한반도 침략은 필연적인 상황이 됐다.

요시다 쇼인은 울릉도를 개척해 조선과 만주 진출의 거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요시다 쇼인의 사설학원 쇼카손주쿠를 거쳐간 그의 문하생들 중에 우리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모토 등이다.

이토 히로부미(1841    ~1909)는 4차례나 내각총리대신을 지냈고, 한국초대통감을 지냈던 침략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조슈번의 최하급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는 2차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지휘한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이다. 역시 조슈번의 하급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끝없이 반역을 일삼핬다. 그가 신문명에 호기심이 많은 학자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가였음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장점보다 과격한 폭력성과 호전적인 사상은 결국 아시아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는 아베 신조 총리 역시 전쟁도 불사할 매우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던 박정희가 한 일이 결국 무엇인가?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는 만주 군관학교에서 천황의 개로 살았던 박정희는 끝내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많은 목숨을 빼앗지 않았던가?

일본 시민들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요시다 쇼인을 메이지유신의 뿌리가 되는 근대 사상가 정도로 알아선 안된다.

호전적인 반역가인 요시다 쇼인을 존경하는 지도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지도자의 야욕 때문에 침략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 시민은 주저없이 목숨을 던졌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애국의 길인지 일본 시민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일본회의'를 만들고 이끌어 온 일본 우익의 뿌리에는 요시다 쇼인이 있다. 결국 일본 우익들은 다시 언젠가는 정한론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아베의 반도체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에는 그러한 정한론이 깔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 시민사회가 스스로 아베의 무책임한 행동들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더욱 더 어두워질 수도 있다.

한국은 일본이 침략하던 과거의 무력한 국가가 아니며, 한국의 저력은 깨어 있는 시민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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