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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 행동하는 양심. 평화·민주주의 지도자 “불굴의 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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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장필구 기자) 오늘(18일)은 한민족의 오랜 갈등과 증오의 비극을 뛰어넘고자 했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다. 이와 관련해,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는 지난 13일 방송분에서 추모 특집으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자취를 재조명했다.

행동하는 양심, 눈물이 많았던 남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너무나 인간적인 대통령, 평화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 혹독한 정치 겨울 속 피어난 인간 인동초, 신군부의 손에 밀려 사형 판결까지 받았어도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워 이겨낸 민주 투사, 굳건히 IMF를 이겨내고 다 쓰러져가는 경제를 되살리면서 제 가족과 생명을 위협했던 북한과 당당히 손잡아 화해와 용서를 말했던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 우리가 기억하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7대 대통령 선거전은 일찍이 후끈 달아올랐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10년째 현직 대통령 박정희와 야당 후보로 나선 당시 48세의 김대중의 구도가 그러졌기 때문이다. 1954년 정계에 입문해 1961년 민의원에 당선된 그는 1965년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로 강한 인상을 남겼고 1970년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나를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 드린다”고 약속했으나, 이에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선거 결과 약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됐고, 이듬해 10월 유신 헌법이 확정되면서 그의 주장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시월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말한다.

최고 권력에 당당히 대항했던 괘씸죄였을까?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던 1971년 5월에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2년 후인 1973년 8월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납치 사건 이후에는 가택 연금 또는 정치 활동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78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이듬해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중심이 돼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에 의해 신군부 정권이 들어섰으며, 또 이듬해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당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체포됐다. 1980년 9월에는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2007년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 생활을 할 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인다는 생각이었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분노하거나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또 내가 감옥 생활을 한 것이 그만큼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의미가 큰 거니까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독재는 반드시 망하고 민주주의는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나 독재자를 용납할 국민이 아니다, 국민에 대한 신뢰, 역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좌절해 본 일은 없다”고 회고했다.

다시 정치계로 돌아온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을 이끌어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 만들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를 구성하게 됐고, 5공 비리 조사와 광주 학살 진상 규명 등 민주화 개혁을 발 빠르게 추진했다. 1990년에는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하며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고, 1992년 12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며 잠시 물러섰다.

이후 또 다시 일어선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11일 김종필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고, 결국 네 번의 도전 끝에 15대 대통령에 오르며,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당시 그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정부 수립 50년 만에 처음 이뤄진 여·야 간 정권 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려 마지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북한 핵 문제로 계속되는 군사적 긴장 상태 속에서 단절된 남북 관계 분위기 가운데 임기를 시작한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에는 “남북 간의 평화와 협력을 위한 포용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겠다”, 2000년에는 “적화통일도 흡수통일도 전쟁과 파멸을 가져올 것”, 2001년에는 “햇볕 정책은 확고한 안보의 바탕 위에 북한과 평화 공존, 평화 교류를 추진해 나가면서, 장차 서로가 안심할 수 있을 때 평화통일을 이룩하자는 정책”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는 분단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이 치러졌다. 두 정상의 만남을 전 세계가 주목했고, 평화통일을 위한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인도적 문제 해결 또는 경제협력 등 5개 항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남북관계는 합의의 시대에서 실천의 시대로 전환할 수 있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중심을 잃지 않았던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가졌던 언론 인터뷰에서 “역사를 보면 결국에는 국민의 마음을 잡고 또 국민을 따라간 사람이 패배한 법이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패배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은 후라도 반드시 그 목표가 달성되고 성공한다.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국민의 역량 또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3선 개헌을 반대하던 그런 국민의 역량, 71년 나를 지지하던 그런 국민들의 열광적인 형태, 이런 것을 보면 이국민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내 소신, ‘해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앞에 서서 희생하는 사람, 불붙이는 사람, 소리지리는 사람이 필요한다. 그들 중 하나가 ‘나’다. 남이 안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난 14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로서 KBS1 ‘오늘밤 김제동’에 출연했던 김홍걸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을 국민들이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냐?”는 김제동의 질문에 “정치인으로서는 국민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끝까지 간직했던 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불굴의 투지로 싸우셨던 분, 이렇게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인간적으로는 누구라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KBS2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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