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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일왕 향해 폭탄 던진 독립운동가…’그의 업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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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김효진 기자) ‘이몽’에 윤봉길 의사의 일왕 생일 축하식 폭탄 투척 의거가 등장하며 그의 업적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의열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함께 홍구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 짧지만 강렬했던 윤 의사의 생애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그가 꿈꾸었던 나라를 살펴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세의 나이로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윤 의사는 당시 민족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윤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 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 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 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 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도모 및 체력 향상 등 윤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계몽,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윤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길, 백범 김구와의 만남

계몽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윤봉길 의사는 그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윤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윤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의 의거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윤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은 윤 의사였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2014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장은 당시 경성지방검찰청의 신문(訊問) 조서 내용을 공개하며 던지지 못한 남은 폭탄이 ‘자결용’이 아니라 ‘거사용’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명확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河端), 상해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32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피체된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윤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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