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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영조 4 정권…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

  • 이예지 기자
  • 승인 2019.04.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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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지 기자] 이인좌의 난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뜨겁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했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됐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이유익·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부터 박필현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갔다.

이에 경중에서는 이하·양명하·윤덕유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나만치·조덕규·임서호·정세윤·이호·민원보·이인좌(청주인)·신천영·김홍수·이일좌 등이 가담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공

또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 내통했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의 발설과 결부시켜 흉언을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와 괘서사건이 일어났고, 또한 이들은 가정·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하고 명화적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했다.

난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 김중만 등이 각지의 취군 동태를 속속 고변했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했다.

난은 3월 15일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됐다.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군관 홍림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했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됐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해 상당성에서 궤멸됐다. 한편, 이인좌의 반란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했다.

영남 지방은 정온의 4대 손인 정희량이 조묘의 천장을 구실로 민정을 모집해, 이웅보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창에서 일어나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해 쉽게 두 지역을 장악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했다.

이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해 토벌했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계를 넘어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호남 지방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이 모주로 무장에 유배중인 박필몽 등과 내통했다.

그러나 전라 감사와의 연결에는 실패해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됐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했으나 체포되어 처단됐다.

3월 14일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하여 경기도 각지에서 취군 현황이 속속 보고되자, 영조는 도성문을 폐쇄하고 경외의 관군을 동원해 서울의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박찬신을 도순무중군으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3월 24일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권서봉·목함경 등을 생포했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됐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해 4월 19일 개선하였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했다. 난의 평정에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 추이에 그들의 처지를 약화시켜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됐다.

반면에 영조 즉위초부터 주창되어온 탕평책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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