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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미식회’ 황교익, ‘친일논란’ 관련 해명…“조선궁중음식이 친일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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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김현서 기자) 황교익이 친일논란에 대해 입을 열였다. 

5일 황교익은 자신의 SNS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친일논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한국음식문화에서 굳이 친일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면 조선궁중음식이 친일의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이씨왕가의 음식을 두고 조선궁중음식이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인터넷 커뮤니티

앞서 황교익은 자신이 출연하는 ‘수요미식회’에서 불고기가 일본어 야키니쿠의 번역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어 장어와 국수 편에서도 일본의 조리법을 따라한 것이라 설명해 비난을 받았다.

아래는 황교익 SNS의 전문이다. 

한국음식문화에서 굳이 친일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면 조선궁중음식이 친일의 음식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이씨왕가의 음식을 두고 조선궁중음식이라 하기 때문이다. 기레기들이여, 일어나라. 친일의 조선궁중음식을 파하라. (이 글에서는 일본 왕족을 황족이라 쓴다. 일본 황족 밑에 빌붙어 살았던 이씨왕족과의 분별을 위한 것이다. 일본 왕족을 높여 부르려는 의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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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이 먹었던 음식, 일본 황족이 먹었던 음식>>

(이 글에서는 일본 왕족을 황족이라 쓴다. 일본 황족 밑에 빌붙어 살았던 이씨왕족과의 분별을 위한 것이다. 일본 왕족을 높여 부르려는 의도가 아니다.)

드라마 대장금이 아시아 방송계를 강타할 때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가 일본의 한 역사학자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역사 드라마를 제작할 때에 전공학자의 고증 작업을 거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왕의 음식을 여자가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였고, 이건 한국사 왜곡을 넘어 유교문화권에 드는 아시아 역사 전체를 왜곡하는 일일 수 있다고 하였다. 주 교수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이런 농담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하였다.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주 교수의 위트에 박장대소하였으나 가슴 한쪽이 많이 쓰렸고, 그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고, 한국의 역사 드라마는 역사와 크게 관련 없이 ‘자유로운 영혼들’에 의해 판타지로 제작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전공자가 아니어도, 역사 자료를 아주 조금만 뒤져도, 여자가 왕의 음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장금 제작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도 스스럼없이 ‘표현의 자유’를 믿고 판타지를 만들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드라마를 판타지로 소비하면 될 일인데,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이 꼭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많이 있다. “왕의 음식을, 남자와 여자 중에 누가 하였을까요?” 하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여자요” 하고 말한다. ‘교과서 역사’에서는 조선 왕이 어떻게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으니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을 것이고, 드라마가 제공하는 판타지로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은 ‘남자의 나라’였다>

조선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는 증거 자료는 많다. 조선음식 연구자인 김상보 대전보건대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400명 내외의 남자 요리사가 궁중의 음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요리사는 숙수라 불리었으며 궁 밖에 살면서 출퇴근을 하였다. 숙수의 아들은 숙수가 되어야 하는, 일종의 궁궐 노비였다. 주방 인력 중에 몇몇 여자도 기록에 보이는데, 음식을 상에 차려 내거나 설거지 정도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왕의 요리사가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그림이 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이다. 1605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왕인 선조가 마련한 경로잔치를 그린 것인데, 왕이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왕의 요리사들이 음식을 하였다. 다 남자이다.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풀이는 주영하 교수의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를 보길 바란다. 그림 속에 상을 차리는 여자가 나오는데, 여자는 그 정도의 일을 하였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다. 왕은 조선이라는 유교 집단의 제사장 노릇도 하였다. 궁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사를 지내었다. 그 법도는 유교식으로 엄격하였다. 연회도 유교식으로 법도를 지켰고, 일상에서도 유교식의 예의범절을 따랐다. 남녀가 유별한 유교의 법도에 따르면, 조선에서 으뜸가는 제사장의 음식을 감히 여자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본인 학자가 드라마 대장금을 거북해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꼭 유교가 아니어도 왕의 요리사는 남자여야 했다. 유럽에서도 왕이나 귀족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여자가 해내기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족을 먹이는 음식을 하는 것과 집단으로 한번에 많은 사람을 먹여야 음식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요즘에야 수도꼭지만 올리면 물이 쏟아지지만 그때에는 물을 길어 날아야 했다. 여자가 하기 힘들다. 밸브만 돌리면 되는 가스도 없다. 장작을 패고 불을 붙여야 한다. 여자가 하기 힘들다. 솥이 ‘스텐’도 아니고 알루미늄도 아니다. 그 무거운 무쇠솥을 닦고 들어올리고 하여야 한다. 여자가 하기 힘들다. 고기도 정육점에서 부위별로 잘 손질한 것을 사올 수 없다. 논밭일로 근육을 키웠을 늙은 소의 질긴 고기를 상온 상태로 가져왔을 것이다. 칼이라곤 그 무딘 무쇠칼. 발골과 정육의 작업이, 여자가 하기 정말 힘들다. 왕의 요리사는 남자가 할 수밖에 없다.

<조선에 여왕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될 때에 왕의 요리사가 여자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이를 지적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역사 문제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한국인이거늘,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까닭은, 조선 궁중음식 전문가로 방송 등에 등장하는 이들이 모두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대장금 이전에 이미 한국인은 “조선 왕의 요리사는 여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왕의 요리사가 여자인 것으로 한국인이 착각하게 된 것은 1970년 조선왕조 궁중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제1대 기능보유자가 한희순이었다. 여자였다. 이어 2대 황혜성, 3대 한복려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여자이다. 이 때문인지 보유자뿐만 아니라 방송 등에 등장하는 궁중음식 연구자들은 거의가 여자이다.
이건 ‘여자 남자 편가르기’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의 왕은 남자이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여왕은 상상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는 사실은 명확히하여야 한다. 물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에서는 궁중음식을 여자가 연구할 수도 있고 또 조리하여 팔 수도 있을 것이나, 역사적 사실 자체를 혼돈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특히, 경복궁에 소주방을 복원하면서 여자 요리사로 그 공간을 채우는 일 같은 것은! 정부의 전통문화 행사에 대장금을 앞세우는 일 같은 것은!

(이 글에서는 일본 왕족을 황족이라 쓴다. 일본 황족 밑에 빌붙어 살았던 이씨왕족과의 분별을 위한 것이다. 일본 왕족을 높여 부르려는 의도가 아니다.)

<일본 황족의 음식을 문화재로 삼다?>

더불어, 제1대 기능보유자 한희순에 대한 평가는 다시 하여야 한다. 여기서부터 조선 왕의 요리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한희순은 조선의 마지막 주방상궁이라며 중요무형문화재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그가 과연 주방상궁이었는지부터 의심이 든다. 한희순은 1889년에 태어났다. 13세에 궁중나인이 되었다 하는데, 그러면 1902년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궁내부가 해체되는데, 그때 한희순의 나이가 21세이다. ‘궁내부 해체’라는 말은 조선 궁중의 살림을 맡던 사람들이 쫓겨났다는 뜻이다. 상궁은 조선의 관직이다. 정5품으로, 궁에 들어가 30년은 넘게 근무하여야 여기에 오를 수 있다. 21세에 상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경술년 이후 이 직책은 없어지니 상궁이 될 수가 없다.
경술년 이후 한희순은 이씨왕가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궁내부 해체로 숙수들도 뿔뿔이 흩어졌으니 그가 왕가의 식솔들을 거두어 먹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희순이 음식 솜씨가 좋았건 어떻건 대물림의 숙수가 아니니 그의 음식을 두고 조선 왕의 음식으로 여기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음식은 차치하고, 한희순이 국가 지정의 중요무형문화재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가 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역사 문제를 그때에 간과하였다. 심각하게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다.
조선은, 아니 대한제국은, 아니 이씨왕가는 일제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다. 일본 왕가에 복속되었을 뿐이다. “…전 한국 황제를 책봉하여 왕으로 하고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라 칭하니 후손들이 이 훌륭한 하사를 세습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며, 황태자 및 장래 세습할 자를 왕세자로 하며, 태황제를 태왕으로 하여 덕수궁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이라 칭하고, 각각 그 배필을 왕비, 태왕비 또는 왕세자비로 하여 모두 황족(皇族)의 예로써 대하여…” ‘한국 황실의 지위에 관한 일본 천황의 조서’(1910년 8월 29일) 중의 일부이다. 이게 뭔 말이냐 하면, 이씨왕가가 일본 황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왕이니 이태왕이니 하는 왕의 칭호도 사용하였다.
그러니, 한희순이 거두어 먹인 이들은 일본 황족이 된 이씨왕가의 사람들이며, 넓게 보면 한희순의 음식은 일본 황족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희순의 음식을 대한민국에서 국가 지정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삼는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은 경술년에 있었던 일본 황족의 결정을 따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망측한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일본 왕족을 황족이라 쓴다. 일본 황족 밑에 빌붙어 살았던 이씨왕족과의 분별을 위한 것이다. 일본 왕족을 높여 부르려는 의도가 아니다. - 왜 이 글을 반복해서 다느냐 하면 일본 왕족을 황족이라 높여 부른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퍼갈 때 괄호 안의 글도 꼭 퍼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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