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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정조의 남자 다산 정약용,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나게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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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진병훈 기자) 26일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86회 ‘정약용, 다산초당에서 꿈꾼 세상’이 방송됐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정조의 뜻을 담아 수원 화성을 설계했던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당시 청나라로 통해 흘러들어온 서양 과학책에 집중했다.
서양 과학책에 등장한 기기도설을 응용해 거중기를 개발한 정약용은 수원 화설을 건설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동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애초에 10년이 걸리는 기간을 2년 9개월로 단축시켰고 4만냥을 절감했다. 거중기는 딱 1대만 사용했다. 
정약용은 또한 정조의 화성행차를 위해 한강에 80여 척의 배와 뗏목을 잇대어 배다리를 설치하는 기술력까지 보여줬다.
조선의 다비친로도 불리는 정조는 과학자였던 동시에 의학자, 법률가, 사상가, 정치가이기도 했다.

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 캡처
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 캡처
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 캡처
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 캡처

정약용은 기존 성리학적 세계관에 빠져 있던 노론과는 달리 실용적인 학문, 즉 실학에 집중했다.
공동 노동과 분배, 토지 제도의 불평등 개선 등은 당시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성리학만을 주장하는 노론은 정약용과 가족이 천주교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정약용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결국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보수적인 세력이었던 노론은 천주교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천주교 탄압에 들어가기도 했다.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의 지시에 따라 남인인 정약종 등과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를 우리는 신유박해(신유사옥)라고 부른다.
KBS1 ‘역사저널 그날’은 매주 일요일 밤 9시 40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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