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뉴스 김노을 기자) 충무로가 “한국 영화는 예고편만 보면 다 본 거다”, “영화관에서 한국 영화 보면 돈 아깝다”는 말을 들은 지도 오래다. 물론 ‘무조건 외화’라는 식의 편견을 가진 관객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국 영화계가 마냥 당당할 수만도 없었다.
변화를 도모하고자 우물을 박차고 나온 영화인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홍경표 촬영감독이다.
여러 작품의 촬영부를 거쳐 1998년 영화 ‘하우등’으로 본격 입봉한 홍경표 촬영감독은 ‘반칙왕’(2000), ‘시월애’(2000), ‘킬러들의 수다’(2001), ‘지구를 지켜라!’(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3), ‘M’(2007), ‘마더’(2009), ‘설국열차’(2013), ‘해무’(2014), ‘곡성’(2016), 그리고 ‘버닝’(2018)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충무로 대표 촬영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가 할리우드의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을 도입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DP란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각각 존재하지 않고 촬영감독이 조명, 그립팀을 직접 꾸리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당시 충무로는 DP 도입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으나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빛’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를 밀어붙인 결과 그는 자신만의 현장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더욱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설계를 가능케 했다.
이렇듯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통해 한국 영화계가 지나온 변곡점을 톺아본다.
설국열차(Snowpiercer) | 2013 | DIR. 봉준호 | 125분
영화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등으로 국내외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은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설국열차’.
동명의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Le Transperceneige)를 영화화했으며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고아성, 에드 해리스, 제이미 벨, 존 허트, 틸다 스윈튼 등이 출연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을 비롯한 한국, 미국, 영국, 체코, 헝가리 등 다국적 배우들과 스태프, 그리고 체코 바란도프 스튜디오에서의 촬영까지. 당시 ‘설국열차’ 촬영은 한국 영화의 도전 그 자체로 보였다.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제작된 ‘설국열차’는 프로덕션 대부분이 세트 촬영이었다. 긴 열차라는 비좁은 공간에서 오는 느낌과 온갖 군상을 살리는 게 관건인 현장에서 홍경표 촬영감독은 인물에 집중했다. 무질서 속 실존하는 인물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겼다.
봉준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35mm 셀룰로이드 필름을 고집했다. 26만자의 필름을 사용한 ‘설국열차’는 디지털로 상영됐음에도 불구하고 필름 특유의 질감과 색감을 구현해냈다. 비단 할리우드 뿐만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도 디지털 카메라가 익히 사용되고 있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특별했다.
봉준호 감독은 개봉 당시 한 GV에서 “좁은 열차 내부 인산인해인 사람들을 담고 싶었다.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홍경표 감독이 실현해줬다. 열차의 각 칸이 열리 때 혹은 액션 장면에서 보여준 드라마틱한 직사광선처럼 아름다운 빛 설계에 감동했다”며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는 홍경표 촬영감독이 촬영과 조명 모두를 아울렀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설국열차’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바로 횃불 전투 신이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인위적 조명이나 CG를 원치 않았기에 배우들은 실제로 횃불을 들고 연기해야 했다. 그 결과 열차 안 군상들이 한데 엉켜 감정이 폭발하는 명장면이 탄생했다. ‘설국열차’ 명장면은 홍경표 촬영감독의 노련함이 투영된 결과다.
곡성(哭聲, THE WAILING) | 2016 | DIR. 나홍진 | 156분
개봉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회자되는 영화 ‘곡성’은 한국 영화계에 어떠한 변곡점을 가져왔음에 분명하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잡지인 프랑스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곡성’ 공개 당시 “‘곡성’은 올해의 영화”라는 평가와 함께 최고 평점을 부여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포지티브’ 또한 “나홍진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줬던 재능을 초월해 악에 대한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선사한다”고 호평했다.
국내외 평단을 모두 홀린 ‘곡성’은 그간 한국 영화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으로 홍경표 촬영감독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전작 ‘해무’ 촬영으로 심신이 고단했던 그였지만 ‘곡성’은 쉬이 밀어낼 수 없는 작품이었고, 고민 끝에 나홍진 감독의 손을 잡았다.
로케이션은 전라남도 곡성군이었다. 곡성이라는 시골이 풍기는 기묘함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홍경표 촬영감독은 나홍진 감독과의 작업을 “재즈 같았다”고 표현했다. 즉흥성 때문이다. ‘곡성’은 콘티도 없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잘 짜여진 콘티에 따라 프로덕션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곡성’은 노선을 달리했다. 대자연 속에 자리한 채 눈속임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새벽의 단계적 어두움과 밝음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아냈다. 짙은 어둠부터 닭이 세 번 울 때의 여명까지 말이다.
또한 모든 영화가 그러하듯 ‘곡성’ 역시 스토리와 촬영이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
나홍진 감독은 기괴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원했고, 이를 위해 홍경표 촬영감독은 아나모픽 렌즈를 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아나모픽 렌즈는 좌우 넓은 장면을 표준 크기의 필름 영역으로 압축·전환하는 광학 렌즈로 와이드 스크린 영화의 촬영과 영사를 위해 고안됐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아나모픽 렌즈를 통해 실제로 먼 거리를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해 자연이 인물에게 한층 다가온 느낌을 표현했다.
화면비가 시네마스코프인 ‘곡성’은 관객에게 주어지는 배경, 인물 등 영화적 정보가 많다. 이 때문에 관객은 종구(곽도원)처럼 드넓은 자연의 위압감 앞에서 혼란을 느끼며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영화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곡성’은 개봉하면 논란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만큼 한국 영화에서 좀체 볼 수 없는 그림과 빛이 담겼다”고 말했다.
이처럼 평단과 관객들을 모두 홀린 ‘곡성’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며 한국 영화계에 이단아처럼 존재하고 있다.
버닝(BURNING) | 2018 | DIR. 이창동 | 148분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영화 ‘버닝’은 이창동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의 첫 협업이었다.
이미 연출과 촬영의 분야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각자의 필모그래피로 미루어봤을 때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주변에서도 두 사람의 협업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영화 개봉 당시 홍경표 촬영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곡성’ 촬영이 끝난 뒤 이창동 감독님이 같이하자는 연락을 주셔서 깜짝 놀랐다. 감독님이 그동안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어오셔서 나와는 잘 안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주변의 우려는 기우였다. 이창동 감독, 홍경표 촬영감독은 ‘버닝’으로 각자의 필모그래피에 그리고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노련한 필모를 추가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버닝’에서 오롯이 영화적 이미지에 집중해 원초적인 감각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렇게 두 사람의 필모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작품이 탄생했고 강박적으로 스토리를 나열하던 영화계에 각성을 일으켰다. ‘영화는 이미지’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화두로 꺼낸 것이다.
다행히도 이창동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공간과 빛에 대한 방향성이 같았다.
영화의 서사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공간과 빛이라 믿는 홍경표 촬영감독은 인물의 감정, 행동, 공간 묘사가 탁월한 이창동 감독의 시나리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작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창동 감독은 인공광을 최소화하고 자연광을 살리는 방향의 조명 설계를 지향한다. 그리고 ‘버닝’을 통해 그것을 극대화했다. 정제되지 않은 인물들의 감정, 대조적인 공간들은 일말의 속임수도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카메라에 담겼다.
해미(전종서)가 석양과 함께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는 신, 종수(유아인)가 새벽 어스름 속에서 달리는 신을 비롯한 장면들은 가히 압도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들은 오로지 이미지로 존재한다. 이미지가 서사에 종속되지 않은 덕분이다.
‘버닝’은 이미지를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겨둔다. 앞서 말했듯 메시지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영화는 이미지’라는 명제에 충실했던 결과다.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두 감독이 이처럼 새로운 도전을 한 데서 오는 경외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변화를 위해 거침없이 몸을 내던지는 홍경표 촬영감독은 현재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패러사이트’를 촬영 중이다.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은 두 가족 이야기를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낼, 좀 이상한 가족 이야기인 ‘패러사이트’는 오는 2019년 개봉을 목표로 프로덕션에 매진하고 있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패러사이트’에 어떤 색과 빛을 담아낼지, 스크린 위로 펼쳐질 이야기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