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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설민석, 끔찍한 증언에 ‘눈물’ “토벌대가 3살 아이의 다리를 잡고…”
  • 김노을 기자
  • 승인 2018.04.1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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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을 기자] 한국사 강사 설민석이 ‘제주 4.3사건’ 특강 중 눈물을 보였다.

지난 3일 방송된 KBS ‘제주 4.3 70주년-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에서 설민석은 특강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이날 설민석은 제주 4.3사건을 직접 겪은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료를 전했다.

KBS ‘제주 4.3 70주년-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 방송 캡처
KBS ‘제주 4.3 70주년-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 방송 캡처

그는 “이 자리에 사료를 갖고 나오지 못한 끔찍한 증언이 많다”며 “제주도 빌레못이라는 곳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인데 그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토벌대에 들켰다. 토벌대가 3살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 쳐 죽였다고 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이어 “아들이 이제 3살이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잔인한 죽음을 당해야 하냐. 당시 이 모습을 지켜본 가족의 심정은 어떻겠는가”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설민석은 또 “제주 4.3사건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다. 비극적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현창용은 1948년 제주시 노형동 자택에서 어머니와 잠을 자다 경찰에 끌려가 인천형무소에서 군사재판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고 박동수는 1949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서 군인들이 쏘는 총을 피해 달아나다 폭도로 내몰려 인천형무소에 끌려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폭도로 내몰려 경찰에 끌려간 뒤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유죄를 선고 받고 인천형무소 수감 생존자인 현창용(86), 박동수(85)씨 등 모두 17명이 2017년 3월 28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증명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행정재판인 '판결의 부존재' 소송도 동시에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은 수형인은 2530명, 일반 재판 수형인은 1306명이다.


◆ 사건의 발단
▲ 배경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반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되어 쌍방간의 적개심으로 일어났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좌익계열 활동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47년 제주 북초등학교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래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전단지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명이 참여했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했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 17일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또 다시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4월 10일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됐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주민 70%가 좌익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은 어느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사건의 시작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 전쟁이 휴전될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7월 27일 한국 전쟁이 휴전되고 그후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됐다.


▲ 경과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말 그대로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됐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 버린, 이른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이 강경 진압작전은 결국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여 명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劉載興)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비극은 또다시 일어난다. 한국전쟁 내내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됐다.


△ 남로당과 미군정의 전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예정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남로당제주도지부의 김달삼 등은 남로당 중앙당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것이 제주도 4.3 사건의 시작이었는데, 그러나 제주도 남로당 세력들은 외부와 고립된 제주도 지형과 미군의 대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일으킨 셈이었다.

한편 현장에서 경찰관 가족, 민족청년단, 서북청년단 단원 가족, 독립촉성회 당원 가족들이 처형되고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우익세력은 제주도 파르티잔 세력을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에서 열었고, 곧 미군정에도 '빨갱이 토벌 작전'을 요청한다.

이에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했고, 제주도 도령을 공표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1948. 11)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1948. 11)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 협상 실패와 사태 악화
처음에는 상호 간에 수십 명이 살해당했지만, 이후 4월 28일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이 더이상의 피해를 막고자 남로당 무장대 대장 김달삼과의 회담을 가져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강경 일변도의 진압정책으로 나와 이러한 평화협상은 깨졌다. 5월 1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오라리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일명 오라리방화사건)으로 합의가 파기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5월 5일 오전 12시, 4.3 사건의 해결을 놓고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진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기강문란을 탓하며 제주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설명과 증거물이 전부 조작이라며 부인하더니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었고 몸싸움이 벌어져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됐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고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투표소가 피습을 당하여 기록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 효처리됐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했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후 문상길 중위(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형집행 1호)등 모 부사관 등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 학살
6월 중순경 김달삼 등은 1948년 9월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벗어났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제주도 빨치산으로 홍보했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에 놓였으나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했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됐다.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남로당과 무관한'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① ‘초토화작전’실시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19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는 중산간 마을에 불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작전’이 
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였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다. 이 지시는 ‘초토화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 초토화(焦土化)작전 
원래 전통시대 중국의 전법인 견벽청야(堅壁淸野)에서 비롯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주로 이 작전을 구사했다.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과 1920년 간도대참변에서 한국의 의병과 독립군을 토벌할 때, 그리고 1937년 난징대학살 때 중국인을 대상으로 써먹었던 전법이다. 적군이 주둔하고 있던 거점지역의 민가와 주민?식량을 방화?살육?약탈(三光)하고, 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三盡) 전술로도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복무했던 한국인들이 해방 후 경비대 장교로 부임하면서 이들에 의해 초토화작전이 재연되었다. 초토화작전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례가 4·3사건이다. 
군사전략이나 교리에서 초토화작전(Scorched Earth, Ground Zero Strategy)은 삼광작전(Three All Strategy), 절멸전략(Annihilation Strategy) 등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
◇ 송요찬 제9연대장의 포고령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의 포고문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조선일보, 1948. 10. 20.

◇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문
1948년 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諭示文)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국무회의록, 1949. 1. 21.


② 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 태웠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代殺). 이러한 소개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이는 수 많은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1월 이후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한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 등은 ‘토벌대 진영’이라 하여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무장대 세력이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들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에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130여 마을이 소개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군 수뇌부는 2연대의 강경작전을 위해 전투력 강화에 힘썼다. 우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을 군?경에 파견하였다. 2연대의 3개 대대 중 3대대는 많은 서청 단원들로 편성되었다. 

토벌대는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하였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사건’1)도 2연대 3대대에 의해 집행되었다.


③ 한라산 피난자의 복귀와 무장대 소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공작에 따라 많은 입산자들이 피신해 있던 은신처를 나와 삼삼오오 귀순하여 왔다. 귀순자들은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어린이?노인들도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두어졌다. 선무작전이 4월까지 수행되면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계속 속출 하였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자를 합쳐 거의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 당국은 원래의 회유 방침을 무시하고 강경한 처리로 일관하였다. 
형량도 죄명도 모른 채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1,650여명의 귀순자들은 육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세력이 이미 와해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덕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주는 영향은 컸다. 이에 고무된 국방부는 제2연대의 활약으로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덕구는 경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된 것이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루 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④ 행방불명된 사람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 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예비검속으로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모슬포 양곡창고에 갇혀있던 250여 명의 검속자들은 8월 20일 밤중에 끌려나와 모슬포 섯알오름 기슭 탄약고 터에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 뒤 1956년 3월 한림지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61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읍 금악리 ‘공동장지’에 안장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대정지역 유가족들이 132구의 유골을 수습하여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해 묘역을 조성했다. 이 묘역은 1960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산지항 앞 바다에서 수장되거나, 정뜨르비행장에 끌려가 총살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서귀포경찰서에도 솔동산 근처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약 250명의 검속자들이 두 차례에 걸쳐 계엄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사선을 뚫고 살아나 일반재판 및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의 제주출신 형무소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37,335명이었고, 이 중에 평택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는 20,229명이었다. 

제주에서 이송된 4?3 관련 재소자는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과, 두 차례 군법회의 대상자 중에 만기 출소한 사람을 제외한 2,350여 명이 6?25전쟁 직후에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2,500여 명 대부분은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제주사람 300여 명은 7월 초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는 그때 시신이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땅 속에 묻혀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제주출신 수형인 142명도 군?경에 인계되어 대구 달성군 가창골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 형무소 재소자 총살은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형수가 아닌 재소자들을 총살한 것은 또 하나의 불법 학살이었다. 

1947년 3?1사건과 뒤이은 총파업으로 상당수 제주도민은 피검되거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물 막은 섬에서 쫓기는 자의 도피처로 떠오른 곳이 일본이었다. 또 1948년 4?3 발발 이후에도 감시의 눈을 피해 조그만 밀항선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4?3 봉기 발발 후 제주도 도령(道令)에 의해 전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그 결과 해상교통이 단절되고 해군에 의한 공중정찰과 해안마을의 경비, 야간 통행금지, 여행증명제, 계엄령 선포, 경찰?경비대?우익청년단의 증강 등이 이뤄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제주도에서 출항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증언을 통해 이 시기에도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사람들이 다수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제주인들은 광복 이후 부푼 꿈을 안고 귀향했으나 4?3사건으로 생활이 불안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사카 등지를 중심으로 모여 한을 품은 채 살아왔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북송(北送)’때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고향 제주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이념과 분단의 장벽 때문에 눈앞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4?3으로 인한 운명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제주도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제주 출신 해병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나섰고, 9월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1951년 3월 21일 기존의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및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하여 육군 제1훈련소를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미군 제5공군 군고문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도위수지구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지역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 육군소속 건축물 및 시설의 보호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수사령부는 제주도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군사시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남아있던 재산 무장대 토벌작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50만 명에 이른다. 제1훈련소에도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입대하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과 해병대에 입대해 참전한 제주 청년들은 1만여 명에 달한다. 정부에서 ‘빨갱이섬’으로 낙인찍은 제주도가 거꾸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패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때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하였다. 지역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사업이 전개되었다.


▲ 결말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당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해병대 등에게 학살을 당했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 사후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우익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매 해 4월 3일 같은 날 제사를 하는 제주도민이 상당수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우익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한편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됐고,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은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25일 월북, 국기훈장2급을 수여받았으며,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가 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김달삼은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4.3사건으로 인한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제주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제주4·3평화공원은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제주 평화 공원 조성 사업이 이루어 졌다. 

2001년 6월 기본 계획안이 확정되고 2002년 부지 매입 및 실시 설계를 완료한 뒤 2003년 4월 3일 기공식을 가졌다.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주관행사로 치뤄진다. 기념일의 명칭은 '4.3희생자 추념일' 이다.


◈ 4?3사건 피해와 족쇄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 
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1954년 4?3이 종료되면서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 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① 인명 피해 실태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약칭 : 4?3위원회)는 2002년 처음으로 희생자 심사를 실시하여 2014년 5월 23일까지 희생자 14,231명과 유족 59,225명을 결정하였다.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4?3희생자·유족 결정현황
여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할 때, 4?3사건 인명 피해는 2만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4?3위원회’에서 심사하여 확정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84.3%(12,000명), 무장대 12.3%(1,756명)이다. 특히 10대 이하 어린이 5.4%(770명)와 61세 이상 노인 6.3%(901명)이 전체 희생자의 11.7%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1%, 2,990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② 물적 피해와‘잃어버린 마을’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이루어진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크게 마을공동체의 파괴 및 소실, 공공시설의 소각 피해, 산업부문의 피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을 피해는 300여 마을(자연촌, 洞)이었으며, 가옥 피해는 2만여 호(戶), 4만여 채이다. 이러한 수치는 1953년 제주도 당국이 공식 발표한 이재 호수 19,934호, 소실 동수 39,285동과도 일치한다.

4?3 전개 과정에서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와의 잦은 무력 충돌로 학교?관공서?경찰지서 등 공공시설이 소각?파괴되었다. 안덕면과 구좌면?중문면?조천면사무소가 소각되어 호적이 소실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부문의 침체를 가져왔다. 농업?목축업?어업?나잠업?교역 등 각종 산업부문이 정체되어 주민생활에 극심한 어려움을 주었다.

1949년 5월 현재 제주도 전체 인구의 28.8%가 실업 상태에 놓여 있을 정도로 제주도민의 생활상은 극도로 피폐했다.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후 중산간마을 사람들 상당수는 원주지를 찾아 돌아갔다. 마을로 돌아간 주민들이 농토를 개간하고 새로 집을 지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중산간지대는 ‘공비출몰 지역’이라 하여 자주 소개 대상이 되었고, 사건 과정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복귀를 원하지 않는 주민들도 많았다.

중산간마을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이미 사망한 사람도 많았고, 해안지대로 소개되어 정착한 주민들은 각지에 분산되었으므로, 다시 원주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원만하지 않았다.

4?3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1962년까지 원주지로 복귀하지 않은 이재민은 7,704세대, 40,419명이었다. 정부와 제주도 당국의 적극적인 복구사업 실시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재민의 절반 가까운 주민들이 원주지 복귀를 꺼 
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의 복구사업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6?25전쟁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산간지대 새로운 주민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결국 4?3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난민정착 복구사업을 실시했으나 원주민들이 복귀하지 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이 제주도내 각지에 남아있다. 4?3으로 인해 소실된 마을, 곧 ‘잃어버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마을’은 4?3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가운데 일부로서, 주민들이 돌아와 마을을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단순 농경지로 바뀌면서 더 이상 마을로 형성되지 않고 사라진 경우를 말한다.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연좌제의 족쇄
제주 4.3 사건, 유시민 “사망자만 3만여 명…억울한 죽음” ‘비극적 사건’…집단 희생과‘죽음의 섬’ / 연좌제의 족쇄
③ 연좌제의 족쇄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되었다는 것이다. 사태의 와중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제주도민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제도적으로 철폐되었다. 그러나 연좌제는 일제 강점기 ‘요시찰명부’를 통한 감시를 거쳐 광복 후 남북의 체제 대립 상황속에서 ‘신원조회’를 통해 ‘특이자’를 걸러내는 사회적 관행으로 사라지지 않고 공공연히 실시되어 왔다.

4?3사건의 경우 이미 1950년 8월에 보도연맹원 2만 7,000명과 5만여 명의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사찰 당국에 의해 별도로 관리 되었다.

1980년 8월에 이르러서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연좌제를 폐지할 것을 발표했고, 1981년 3월 내무부는 후속 조치로 연좌제 폐지 지침을 발표했다. 1980년에 제정된 제5공화국 헌법(제12조 3항)과 제6공화국 헌법(제13조3항)에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화 했다.

제주도민 대다수는 4?3으로 인한 연좌제 피해 경험을 갖고 있다. 2000년 8월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 연대’가 4?3 유가족 7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이들 유가족이 겪은 연좌제 피해는 다음과 같이 조사되었다(복수 응답).

4?3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인권보호?명예회복 또한 절실한 과제임을 연좌제 피해 실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논란
▲ 진상 규명 노력
제주 4·3학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오히려 금기시했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삼촌’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됐다. 

2003년 10월 15일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2014년 1월 17일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부는 국무회의(의장:박근혜)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 기념(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 했다.


▲ 폭동 논란
월간조선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익 단체들은 4·3사건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과 이들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한다.

월간조선은 2000년 2월호에서 4·3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한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글을 인용했다가 4·3사건 유족회에게 소송을 당해 1,2심에서 패소했으나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원장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체제 전복'이었음에도 이를 진압한 우리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며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 투쟁이자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장로교(통합) 목사 이종윤은 그가 목회하는 서울교회(강남구 대치동 소재) 예배시간에 "4·3 사건은 공산당 프락치 등 좌익 세력들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케이블방송 CT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2010년 11월 20일 뉴라이트계열 출신인 이영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제주 4.3항쟁에 대해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이라 주장했다.

2014년 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무회의 (의장:박근혜 대통령)를 통해 4월3일을 제주 4.3 기념(희생자 추념)일로 입법 예고 했다.

2014년 6월 10일 총리로 내정된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2012년 교회 강연에선 ‘제주 4.3사건’을 폭동이라 규정하며 “제주도 4.3 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제주도)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말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 계엄령의 적법성 논란
1948년 11월 17일 발효된 계엄령이 적법한 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계엄령을 발효한 것은 법률에 의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는 제헌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적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계엄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사건이 1948년 8월 15일 이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지속된 것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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