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제주 서귀포서 열기구 추락 ‘사망1명·탑승자12명 부상’…소방당국 “돌풍 의한 조종력 상실 추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톱스타뉴스 김희주 기자) 제주 서귀포서 열기구가 추락했다.

제주 소방본부는 12일 오전 8시 11분께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물영아리 오름 북쪽에서 열기구가 추락했으나 탑승한 12명 전원이 자력으로 탈출했다고 전했다.

소방당국은 탑승자 모두 의식이 양호하며 중상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뉴시스
사진은 사건과 무관함 / 뉴시스

이번 사고는 고사리 채취객이 최초 목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현장에 출동해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열기구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인류의 꿈은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를 발명하면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형제는 1782년에 예비실험을 수행한 후 1783년 6월에 공개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1783년 9월에는 열기구에 동물을 태운 실험이 실시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열기구로 사람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행사가 벌어졌다. 급기야 1785년에는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열기구 비행이 이루어졌다. 오락용에서 출발한 열기구는 각종 전쟁에서 정찰용으로도 널리 사용됐다.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하늘을 날고 싶어 했다. 그리스 신화에는 다이달루스(Daedalus)가 아들인 이카루스(Icarus)와 함께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크레타 섬에서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13세기에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언젠가 하늘을 나는 기계가 나타나리라 예견했고, 15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인간의 비행을 스케치를 통해 꿈꾸었다.

이러한 꿈은 1783년에 조제프 몽골피에(Joseph-Michel Montgolfier)와 에티엔느 몽골피에(Jacques-Étienne Montgolfier)가 열기구(熱氣球, hot air balloons)를 만들면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 역사상 최초로 하늘을 난 열기구
몽골피에 형제는 프랑스 리옹 인근의 아노네에서 가업으로 제지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형제는 타다만 종이 조각들이 연기에 실려 하늘로 올라간다는 점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연기가 자신보다 무거운 것을 공중으로 띄워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했다. 열에 의해 팽창된 공기가 부력을 발생시켜 기구를 뜨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이 조각이 아닌 다른 계기를 통해 열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의견도 있다. 빨랫줄에 걸려 있던 치마 속으로 연기가 들어가 치마가 공중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셔츠를 말리려고 목 부분을 잠근 채로 난로 위에 걸어두었다가 셔츠가 날아오르듯 부푸는 모습을 보았다는 일화도 있다.

아무튼 몽골피에 형제는 1782년 11월부터 열기구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들은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에 실험에 필요한 시간과 돈을 어렵지 않게 충당할 수 있었다. 몽골피에 형제는 천과 종이로 만든, 속이 빈 거대한 기구 밑에서 불을 피워 뜨거운 공기가 그 안에 들어가게 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열기구는 약 2킬로미터까지 올라갔다. 그때가 1782년 12월 14일이었다.

1783년 6월 5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몽골피에 형제의 공개실험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형제는 린넨 천 조각을 이어 붙여 지름이 12미터에 달하는 기구를 만들었고, 이어 붙인 자리에 종이를 덧붙여 가열된 공기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기구 아래쪽에는 용기가 달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불이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당시에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는 1,800미터 높이까지 떠올라 10분 동안 2.5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갔다.

◇ 샤를의 수소기구
몽골피에 형제의 공개실험에 대한 기록은 과학아카데미에 보내졌고, 과학아카데미는 샤를(Jacques Charles)에게 이에 대한 검토를 맡겼다. 당시에 샤를은 몽골피에 형제보다 더욱 효과적인 비행을 탐색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당시에는 ‘몽골피에 가스’로 불렸다) 대신에 1766년에 영국의 캐번디시(Henry Cavendish)가 발견한 수소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공기보다 훨씬 가벼운 수소를 사용하면,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보다 규모가 작은 기구로도 똑같은 무게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샤를은 로베르 형제(Robert brothers)의 도움을 받아 비단으로 지름 4미터의 공을 만든 후 기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안쪽에 고무를 발랐다. 수소를 만드는 데에는 철 500킬로그램과 황산 250킬로그램이 사용됐다. 그릇 속에 철과 황산을 넣고 세차게 솟아 나오는 수소를 파이프로 연결해서 비단 공 안에 집어넣었다. 이 비단 공은 ‘발룬(ballon)’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커다란 자루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였다.

1783년 8월 27일 저녁, 파리의 중심지 샹 드 마르(나중에 에펠탑이 세워진 장소이다)에서는 샤를의 수소기구에 대한 실험이 실시됐다. 이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는데, 군중 중에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있었다. 샤를의 수소기구는 2분도 되지 않아 1,0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간 후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곧이어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샤를의 수소기구는 다른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샤를은 기구에 주입한 수소의 분량으로 보아 20~25일 동안 기구가 공중에 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구는 약 40분 뒤에 파리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고네스 마을에 떨어지고 말았다. 높은 상공에서 기구 속에 있는 수소의 압력이 바깥 공기의 압력보다 커지면서 비단이 찢어졌던 것이다. 고네스의 주민들은 찢어진 기구를 하늘에서 내려온 악마라고 생각하고 자루를 말의 꼬리에 묶은 후 말을 내달리게 했다. 이런 식으로 세계 최초의 수소기구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 사람을 하늘로 올려 보내다
1783년 9월 19일에 몽골피에 형제는 루이 16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색적인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 사용된 열기구의 명칭은 ‘레베이용(Réveillon)’이었는데, 기구의 제작에 참여한 벽지 제조업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열기구 아래쪽에는 우리가 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양, 오리, 수탉이 타고 있었다. 열기구는 8분 동안 44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 3킬로미터를 날아간 후 인근 숲에 착륙했다. 당시에 루이 16세는 열기구에 탑승한 양을 자신의 개인 동물원에서 키웠다고 한다.

다음 차례는 사람을 태워 기구를 띄워 올리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 실험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를 태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26세의 젊은 의사로 모험을 좋아하던 로지에(Pilâtre de Rozier)가 탑승을 자청했다. 그는 “인류 최초의 유인비행이라는 영광은 사형수가 아닌 선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로지에는 비행을 승인받기 위해 루이 16세 앞에서 수소의 가연성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기도 했다. 한 차례의 예비 실험을 거쳐 1783년 11월 21일에는 파리 서쪽에 위치한 볼노뉴 숲의 뮈에트 성에서 사람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행사가 벌어졌다. 승객은 로지에와 육군 장교인 로랑 다를랑드(François Laurent d’Arlandes)였다.

두 모험가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파리의 하늘을 460미터까지 올라갔다. 비행 도중 기구의 천에 불이 붙었지만, 비상용으로 준비한 스펀지와 물로 불을 끌 수 있었다. 공중에 뜬 지 25분 후 두 모험가는 이륙한 곳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카이예 언덕에 착륙했다. 역사상 최초로 사람이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783년 12월 1일에는 샤를이 로베르(Nicolas-Louis Robert)와 함께 유인 수소기구 비행에 도전했다. 그들은 무려 40만 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튈르리 궁전에서 이륙한 뒤 40킬로미터 떨어진 네슬의 작은 마을에 착륙했다. 당시에 샤를은 수소기구 비행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 전쟁에서 정찰용으로 쓰인 기구
1785년 1월 7일에는 프랑스의 기구제작자 블랑샤르(Jean-Pierre Blanchard)와 미국의 의사 제프리스(John Jeffreis)가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열기구 비행에 성공했다. 그들은 영국의 도버 해안에서 프랑스의 칼레 부근까지 2시간 30분 동안 42킬로미터를 날았다. 중간에 기구가 추락할 조짐이 보이자 그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고무 주머니에 소변을 받아 밖으로 던지기도 했다.

1785년 6월 15일에는 로지에가 가열된 공기와 수소로 채워진 기구를 만들어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데 도전했다. 그러나 두 기체가 섞여 기구가 폭발하는 바람에 로지에는 프랑스의 위머로우에 추락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역사상 최초로 비행 도중에 사망한 사람이 발생했던 것이다.

오락거리로 출발한 열기구는 전쟁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794년의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지상과 밧줄로 연결된 기구를 사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정찰했다. 1861년~1865년에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는 북군이 기구 부대(balloon corps)를 운영할 정도로 기구가 전면적으로 활용됐다. 다재다능한 발명가 로우(Thaddeus Lowe)의 주도하에 부대원들은 남군의 이동을 관찰하고 내려와 그 내용을 북군의 지휘관들에게 전신으로 보고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기구를 대체하는 다양한 비행수단이 등장했다. 비행선(airship), 글라이더(glider), 비행기(airplane) 등이 그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기구는 비행수단의 주역에서 밀려났지만,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놀이동산에서 헬륨을 넣어 만들어주는 호일 풍선(microfoil balloons)이나 대기의 상태를 관측하기 위해 올려 보내는 라디오존데(radiosonde)가 그것이다. 지금도 캐나다 퀘벡 주에서는 몽골피에 형제의 이름을 따서 매년 몽골피에 국제 열기구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뉴스라면 ?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버튼을 눌러주세요.
추천을 많이 받은 기사는 ‘독자 추천 뉴스’에 노출됩니다.

240201_광고보고투표권

기사 추천 기사를 추천하면 투표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If you recommend an article, you can get a voting ticket.


모바일 모드로 보기 Go to the Mobile page 모바일 모드로 보기 Go to the Mobile page.

이 기사를 후원해 주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해외토픽